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269>|제82화 출판의 길 40년(22) |선교출판|정진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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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기독교서회가 발행한 출판물의 거의 모두가 한글전용이었으며, 다만 일제하에 나온 책 가운데 한자를 혼용한 책이 다소 있었다. 기독교서회가 창설되던 당시인 한말에는 부녀자층 거의가 한자를 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문서보급이라는 차원에서 한글전용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이 서회의 출판물은 인쇄및 제본기술의 개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롱셀러인 성서와 찬송가는 꾸준히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인쇄산업과 제본산업이 뿌리내리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인쇄소 대해당의 문선공으로 취직하여 60여년간을 인쇄업계에 공헌한 올해 82세의 배창수 옹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기독교 창문사 (윤치오씨경영)라는 인쇄소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외국 선교사들이 인쇄물의 정확성·정밀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활자 하나하나를 확대경을 들이대고 검사하는 것을 보고 인쇄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지요』
당시에도 이와 같았음을 볼때 오늘의 출판인·인쇄인에게는 큰 교훈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문서보급의 일환으로 특기할 일은 『한영대자전』을 편찬하는 등 사서류를 간행한 일이다.
선교사업에 있어서 「언어」란 필수적인 도구. 1896년 「게일」박사는 『한영대자전』을 편찬했는데 어휘가 3천5백이고, 국판으로 l천8백면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었다. 이는 한영사전의 효시로 길이 기억될 책이다.
한편으로 천주교쪽도 개신교의 출판활동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병행된다. 즉 1877년 밀입국한 「리들」주교가 착수하고 그 뒤에 「다블뤼」신부가 이어받아 편찬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을 1881년봄 일본의 요꼬하마인쇄소에서 발행하였다.
『한불자전』 은 사륙배판 크기에 6백94면이였고, 『한어문전』은 우리말 문법책인데 역시 사륙배판에 3백34면이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우리의 『한글자전』과 『한어문전』을 일본에서 인쇄하는데 성공한 「고스트」신부는 다시금 1885년 한글 성서를 인쇄하여 펴냈는데 1888년에는 그 인쇄소를 서울정동으로 옮겨 왔다. 여기서 사용한 한글활자는 최지혁이라는 보좌원의 글씨를 자본으로 했다고 한다.
정동으로 옮겨온 이 인쇄소야말로 초창기 천주교 문서운동의 전진기지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감리교파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에 설립한 배재학당내에 인쇄소와 출판사를 차렸는데 그 이름이 삼문사였다.
1892년 이곳에서 간행한 『천로력정』은 순한글 목각판으로 현재 배재학교에 보존되어있다. 또 독립신문을 비롯하여 선교초기의 기독교신문들이 대부분 여기서 인쇄되었다.
한편 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도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들을 발행했는데 ,초기에 그가 낸 책은 삼문사에서 제작했다.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각 교파는 삼문사보다 더 큰 기독교서회와 같은 출판사의 출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끝으로 대한성서공회의 출판사업에 대해 알아보자. 「성서공회」는 문자그대로 성서만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반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1883년 창설된 이래 발행된 수량을 보면 1984년 말 현재 성경8백72만8천권, 신약3천1백21만 권으로 공표되어 있다. 이 방대한 출판량이 우리 나라의 종교·사상, 그리고 출판산업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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