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시청석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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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처음에 말이 있었다. 말이 곧 모든 언론의 시작이다.
말은 사물에 이름을 지어붙이기도하고, 사람들에게 세상 소식을 전해주기도 한다. 말은 또 사람들끼리 따지게 하기도 하고 시비를 가리게 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말은 사람들을 어울리게 하기도 하고 흥겨운 얘기가 되어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고 다시 말은 깨우쳐주고, 가르쳐주고, 그럼으로써 결국 사람을 「사람되게」 해주는 것이다.
말이 갖는 이같은 여러가지 구실이 오늘날 언론의 정보·보도기능,토의·비판기능, 오락·화합기능,교양·교육기능, 그리고 사회화·인간화기능이라 일컫고 있는 것들의 바탕이 되고 있다.
말이 있는 곳에는 언론이 있게 마련이요, 그러한 언론은 신문에 앞서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당에 근대적인 언론의 매스미디어라고 하는 신문이 등장한 것은 겨우 백년을 헤아리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에 앞서 이땅에는 천년을 훨씬 넘는 언론 문화의 전통이 꽃피어 왔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고유한 언론전통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간」「간한다」 「간쟁한다」 는 것이 그것이라 생각해본다. 국어사전에는 「간한다」 는 말을 『웃 어른의 잘못을 고치도록 말한다』 는 뜻으로 풀이이하고 있다. 「간」 의 한자도 『바른말로 사람을 깨우쳐준다』 (직언이오인야) 는 뜻이다.
웃 사람의 허물을 곧은 말로 바로잡게 하는 간쟁의 사상은 충 효가 최고의 윤리 규범이 되고 있었던 왕조시대 전통사회에 있어서도 당시의 언론문화를 일관해온 큰 물줄기가 되고 있었음을 조선조의 역사는 증언해주고 있다.
그러나 말이 쉽지.웃 사람의 잘못을 보고 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집안에서는 어버이를, 그리고 밖에 나가서는 임금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섬기던 시절에 부모의 허물이나 나라님의 과실을 직언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식이 어버이를 섬김에 세번간해서 듣지 않으시면 울면서 그에 따르라』 (예기) 고 일렀고, 『부모를 섬기면 은근히 간하고, 따르시지 않는 뜻을 보면 또한 공경하여 어기지 말아야 한다』 (논어) 고 가르쳤고, 그럼으로써『간하되 거역하지말라』 (회자) 고 타일렀던 것이다.「간한다」 는 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군왕과 신하 사이에 있어서이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시대의 이 나라 조정의 언관이나 재야의 사림들은 임금과 그 벼슬아치들이 허물이 있을 때엔 직언을 하고 상소를 올려 그에 대해 간쟁하는 것을 서슴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그러한 간쟁이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이 되고 귀양살이를 하게도 되었으머 더한 경우에는 사약을 받아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언론의 어려움은 간하는 어려움이라 해서 틀림이 없다고 할것이다.
우리가 우리나라 언론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간쟁을 서슴지 않았던 언관들의 직언과 바른 말을 적어 올린 상류문장의 직필속에 그 전통이이어져 왔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말 서재필박사가 이 땅에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 을 펴낼때에『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 할터이오.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해적을 폐일터이오』라고 신문 창간의 취지를 밝히고 나선 것은 그러고 보면 그 뜻이 그대로 간쟁 언론의 전통에 직결되고 있있음을 알수가 있다.
우리가 해마다 4월7일을 「신문의날」 로 정하고 「독립신문」 창간의 뜻을 기리민서,이러한 근대적인 신문발행의 징신이 우리의 전통적인 언론문화에 뿌리박고 있었음을 인식한다는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무엇이 우리 것이고 무엇이 남의 것이냐를 불투명한 동기에시 가리러 드는 사람들,또는 바른말을 두려워하며 솔깃한 말만을 좇으려드는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면, 무릇 비판적인 언론, 간쟁의 언론은 그때마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외래문화의 맹목적인 추종」 이라고 몰아붙여지는 사례들을 한국의 현대사는 여러차례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를 감시하고 그 실정을 비판하는 자유주의형 신문」 은 서구문화의 소산이요,그 자랑이다.
그러나 「언론」 은 신문에 선행하여있어 왔다. 서양의 근대적인 신문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더 우리에겐 군왕과 그 정부관원의 잘못을 용기있게 간쟁한 언론의 전통이 있었고,그러한 언론의 통로, 곧 언로를 활짝 열어 놓아야 된다는 「광개언로」의 사상이 있었다는것이다.
언론문화에 있어 우리의 것,우리에게 고유한 옛것은 따지고 시비를 가리는 언론, 간쟁의 언론, 비판의 언론이었다. 그에 반해서 오히려 남에게서 얻어온것, 남의 흉내를 내고 있는것, 그래서 우리에겐 원래 낯설었던 것은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위아래없이 치고 박는 운동 싸움 구경에 해를 보내는 일, 팔목 발목 걷어붙여 올리고 허리를 흔들어대는 노래 구경 춤구경에 넋을 빼앗기는 일,이른바 매스미디어의 오락기능이다.
만약에 신문조차도 그러한 경기 놀이와 가무놀이에 지면을 다 내주고만다면 그때는 마침내 신문은 있어도 언론은 없다고 하게 될것이다. 「미디어」 는 있어도 「메시지」 (말) 없는신문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점차 나라를 어지럽히는 외래문화의 맹목적인 추종이라 지탄받아서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고유한 전통이란 신문은 없어도 언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없어도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말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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