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 항일운동의 산실…「반골3평」의 한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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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전남 함평은 함평이씨의 아성이다. 고려 충숙왕때 함평부원군에 봉해진 이광봉이 못자리를 잡은 이후 그 후손들이 7백여년동안 문전옥답을 가꾸며 살았다. 함평군일대 2천여호 1만여명이 살고 있다.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는 마을전체 1백여가구 5백여명이 한성바지들이다. 타성바지라곤 10여가구가 살고있을 뿐 지금도 초포리 일대 30만평의 옥답을 모두 함평이씨가 소유하고 있다. 주 소득사업은 예나 다름없이 농사. 농토가 기름지고 비옥해 가구당 연평균소득은 4백만원을 웃돈다.
초포리의 입향조는 조선초에 수사를 지냈던 이춘수.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평에 정착, 후학들을 양성했다. 세종때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긍은 그의 아들.
함평은 일제하에서는 전남지방의 항일운동의 산실로 유명했다. 반골기질과 배일사상이 강했다. 이같은 기질탓에 함평은 예부터 호남사람들이 반골촌으로 꼽는 삼성(장성·곡성·보성) 삼평(함평·남평·창평)에 뽑히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초포리에서 함평읍을 거쳐 서쪽으로 5km남짓거리, 함평읍성남리는 시조 이언의 묘를 모신 함평이씨의 성역이다.
매년 제사날은 양력4월 두번째 일요일. 전국에서 3천여명의 씨족들이 몰려 묘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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