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24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7) 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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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위창 오세창은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정치가 속에 넣는 것이 보통이지만 언론인으로, 서예가로, 또는 저술가로 문화인 쪽의 비중이 더 크다. 그는 금석학의 대가이고 우리 나라 개화운동의 선구자이던 역매 오경석의 아들로 186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여덟 살에 역매의 친우인 유대치집 글방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유대치란 속칭「백의정승」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당의 숨은 지도자였다. 위창은 16세 때 양친이 전염병으로 별세하였는데 1880년 사역원에 급제하여 사역원 직장이 되었고 고종23년에 박문국 주사가 되었다.
박문국 주사란 정부의 관보인『한성주보』의 편집을 맡아보는 일인데 1년 뒤에 논설과 시사해설을 쓰는 일로 승진하였다. 고종31년에는 군국기무처 낭청이라고 해서 예각비서관이 되었고 1893년에는 농상공부 삼서관이 되었다가 다시 통신국장으로 승진되었다.
1897년에는 일본 문부성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의 조선어과 강사로 임명되어 1년 동안 근무하다가 돌아왔는데 그 뒤에 개화당으로 몰려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동경·대판 등지를 방랑하였다. 여기서 천도교주 손병희를 만나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의 간부가 되어 1906년에 귀국하였다. 귀국직후 손병희의 재정적 후원으로 일간신문 『만세보』를 창간하였는데 주필로 국초 이인직을 취임시켰다. 이인직은 춘원 이광수 이전의 근대소설 거장으로 『만세보』 에 유명한 연재소설 『혈의 누』를 실었다.
그러나『만세보』는 경영난에 빠져 이듬해 1907년에 폐간되고 위창은 해산당한 자강회에 이어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만세보』의 속간을 계획하다가 이름을 바꾸어 『대한민보』라고 고치고 1909년 5월부터 위창이 사장이 되어 항일언론을 계속하였다. 이 신문에는 관재 이도영의 시사만화가 인기를 끌었는데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 당한 뒤 그 장본인인 군부대신 이병무가 저 혼자 발가벗은 몸에 장검을 차고 있는 그림을 그려놓고 「벌거벗고 환도차기」란 제목의 만화를 그려 가슴 찌르는 풍자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합방과 동시에『대한민보』도 폐간되었다.
합방으로 나라를 잃은 위창은 손의암아래 천도교도사로 있으면서 전서 쓰기와 전각파기로 소일하였는데 두 가지에서 다 당대 제일이란 이름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근역서화징』의 원고작성을 위하여 널리 자료를 수집하였다. 『근역서화징』은 우리 나라 역대서화가의 인명사전 이어서 이 책을 만드는데 오랜 시일이 걸렸다.
이 책은 지금 고전이 된 명저여서 우리 나라에서 보다도 일본에서 영인본으로 자주 찍어내고 있다.
이러는 동안 기미년이 되어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위창은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3년 징역의 선고를 받았다. 1921년 10월에 가출옥으로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는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위창은 출옥한 뒤에 일체의 사회활동을 평생 동지인 권동진에게 맡겨 그가 신간회 부회장·조선일보사장 등을 역임하게 하였다.
자신은 돈의동의 여박암에 은거하여 즐기는 전자나 쓰고 전각이나 파고 그밖에 다른 저술에 힘썼는데 이 동안에 『근역인수』라는 역대 명현과 서화가의 아호·성명 등의 날인을 집대성한 것과『근묵』이라고 이름지은 역대 명현들의 서찰을 모은 것, 그리고 삼한의 와부을 모은 것 등 많은 문화재를 수집·정리하였다. 간송 전형필을 지도해서 많은 서화·골동을 사들이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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