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꽃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쁨 주고 싶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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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 자원봉사자들이 기부받은 웨딩꽃으로 노인요양시설에서 꽃꽂이 교실을 열고 있다. [사진 FLRY]

지난 19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빠져나가자 봉사자 4명이 식장에 남아 있는 꽃을 조심스레 수거했다. 그리곤 꽃을 들고 인근 마포구의 노인요양시설 효림원을 찾았다. 봉사자들은 이들 꽃으로 화사한 꽃다발을 만들어 어르신들에게 선물했다. 한 할머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꽃을 받았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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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축복의 꽃을, 더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꽃으로 되살리고 싶었어요.” 국내 최초로 웨딩꽃 기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김미라(32·사진) 플리(FLRY· Flower Recycling) 대표의 얘기다. 지난해 6월 시작된 ‘플리’는 결혼식에 쓰고 남은 꽃을 재단장해 미혼모나 독거노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에게 전달하는 기부 프로젝트다.

‘웨딩꽃 기부 프로젝트’ 김미라 대표
결혼식에 쓰고 남은 꽃 재활용해
미혼모,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전달

김 씨는 “결혼식의 꽃 장식에 많은 돈이 드는데 정작 식이 끝나면 꽃이 그냥 버려진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며 “이후 직장 동료와 논의 끝에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들로부터 꽃을 기부받아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입소문을 타고 기부 문의가 늘면서 김씨는 지난해 말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뒀다. 그는 “한해 결혼식 뒤 버려지는 꽃이 4억 2000만 송이나 된다”며 “300명 규모 홀에서 사용된 꽃을 전부 재활용하면 100개 이상의 꽃다발을 만들어 선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68쌍으로부터 1000여 다발이 넘는 꽃을 기부받았다”고 소개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라면 누구나 기부를 신청할 수 있다. 기부한 꽃은 자원봉사자들의 손으로 다시 예쁘게 포장돼 미혼모 시설인 애란원과 노인요양원, 호스피스 병동 등에 전달된다. 기부처를 찾아가 직접 꽃꽂이 수업을 하기도 한다. 김 씨는 “미혼모들도 꽃을 선사하면 ‘꽃을 처음 받아봤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며 행복해한다”고 말했다.

기부자들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모든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김 씨는 “한 신부는 ‘내 인생에서 한번뿐인 부케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전달됐다. 평생 기억하며 살겠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했다.

추진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김 씨는 “처음에는 식장 측에서 ‘이 꽃을 가져다가 어디에다가 쓰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잡상인 취급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다음 목표를 묻자 “한국의 결혼식 문화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다음달부터는 작은 결혼식을 원하는 예비부부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식장을 꾸며주고, 식이 끝나면 꽃을 기부받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김 씨는 “결혼식 꽃을 장식하는 데만 적게는 300만원에서 많게는 5000만원까지 쓸 정도로 낭비가 심하다”며 “소규모 결혼식을 통해 허례허식을 줄이고, 버려지는 꽃을 되살리는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기부 문의는 홈페이지(www.flry.kr)에서 하면 된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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