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기득권 혐오, 이단아…1968년 ‘분노의 대선’ 판박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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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인종 차별 발언과 폭력이 난무하고 분노로 가득 찬 유권자들, 언론의 시뻘건 헤드라인, 그리고 시위자와 경찰의 충돌. 민주당의 ‘기성 정치인’이 선두를 달리고 대학생이 사랑하는 백발의 후보, 분열을 조장하면서 미디어의 관심을 끌 줄 아는 아웃사이더 후보, 능수능란한 연설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녔지만 계략에 능해 비열하다(nasty)란 단어가 따라다니는 변호사 출신 공화당 후보가 선거판을 주도한다.

베트남전 놓고 갈린 민심 유혈충돌
트럼프 반이민 따른 분열과 닮은꼴
월리스 인종차별 선거전도 반복

올해 미국 대선의 해설처럼 들리지만 실은 ‘분노와 혼란의 대선’이라 불렸던 1968년 상황이다. 허핑턴포스트는 14일(현지시간)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리듬(흐름)은 반복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1968년과) 올해를 지칭한다”고 보도했다. 미 대선이 48년 전으로 회귀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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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허핑턴포스트는 트럼프가 68년 대선에 출마했던 조지 월리스와 흡사하다고 분석했다. 출마 당시 49세였던 월리스는 ‘기득권 정치세력’에 대한 증오와 인종 차별을 선거전의 전면에 내세웠다. “미국이 잘못된 것은 백인 이외의 인종, 이민자 등 ‘미국스럽지 않은 것’에 원인이 있다”는 그의 주장은 트럼프와 다를 게 없다. 그는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자신의 노선이 문제가 되자 탈당해 ‘아메리카독립당’을 창당한 뒤 독자 후보로 나섰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주당 표를 분산시켜 대선에서 공화당에 어부지리를 안겼다. 트럼프의 향후 운명이 어떻게 될 지 모르나 민주당과 공화당 이름만 뒤바뀌었지 현 상황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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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태가 빚어진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

허핑턴포스트는 테드 크루즈(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상원의원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68년의 리처드 닉슨(듀크대 로스쿨 출신)을 연상케 한다”고 지적했다. 동료 상원의원들에게 전혀 사랑 받지 못하고, 온갖 야비한 비판을 법률적 수사로 능수능란하게 포장해 경쟁자를 몰아붙인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매체는 “역사의 리듬이 반복된다면 닉슨이 막판에 월리스 지지자들을 끌어와 이겼듯 크루즈도 트럼프 지지자를 끌어들여 이길 기회가 있다”고 썼다.

68년 민주당 후보를 놓고 격돌한 허버트 험프리 전 부통령은 클린턴 전 국무장관, 유진 매카시 전 상원의원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흡사하다. 험프리는 정치권의 대표적 ‘기득권 세력’으로 지지층도 안정 추구 세력과 흑인·노조였다. 전 정권의 인기 없는 정책들, 특히 베트남전쟁과 징집 등을 고수하느라 애를 먹었다. 버락 오바마 정권의 의료정책(오바마케어)의 유지를 선언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찬반에 있어 애매한 입장을 취하며 고전 중인 클린턴과 닮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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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의 유세장에서 충돌한 유권자들.

반면 반전과 진보의 선봉에 서서 ‘옆집 삼촌’ 같은 이미지로 선풍을 일으켰던 매카시는 샌더스와 백발의 외모뿐 아니라 정책·스타일이 유사하다. 대학생 등 젊은 유권자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고 샌더스와 마찬가지로 뉴햄프셔 경선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허핑턴포스트는 최근 트럼프 유세장과 거리에서의 폭력 충돌과 관련, “최악의 유혈 폭력사태로 얼룩진 68년 민주당 전당대회가 떠오른다”며 “오는 7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공화당 전당대회 개최 도시) 행사장 밖 모습은 더 참혹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68년 당시 경선에 불참했던 베트남전 지지파 험프리가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결정되자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또 경선 기간 중 민권운동 지도자인 마틴 루서 킹 목사(4월)와 로버트 케네디 민주당 경선 주자(6월)가 암살당하는 혼란이 잇따랐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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