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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구분 철저한 아이돌 세상, 그래도 현실의 흙수저보다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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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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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사회부문 기자

‘프로듀스 101’. 요즘 큰 화제를 몰고 다니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다. 말 그대로 101명의 연예기획사 연습생들이 시청자 앞에서 공개 경쟁을 거쳐 11명의 아이돌 걸그룹으로 ‘만들어지는’ 식이다. 어마어마한 수의 참가자와 이른바 ‘악마 편집’ 같은 흥미 요소로 인기를 얻었다. 지난주 대학 동기 모임에서도 “재미있다. 꼭 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직접 방송을 접하고선 씁쓸함만 남았다. 출연자들은 학점에나 쓸 법한 A~F라는 ‘등급’을 실력별로 부여받는데, 심지어 등급별 옷 색깔도 다르다. F그룹은 옷에 부착된 등급표를 거울에 비춰보며 “F가 반사되니 ‘ㅋ’ 같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런 연습생들이 데뷔한다고 해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설 연휴 방송된 ‘사장님이 보고 있다’란 프로그램이 단적인 예다. 여기선 기획사 사장들이 체력과 개인기 등 성공을 위한 5가지 ‘덕목’을 정해 소속 아이돌을 테스트했다. 예능이란 점을 감안해도 팔짱 낀 사장 앞에서 잘 보이려 애쓰고, “1등 하면 소고기 사주세요”라고 외치는 건 보기 불편했다. 회식 때 직장 상사 앞에서 탬버린을 흔드는 신입 사원이 오버랩된 걸까.

 요즘 TV는 아이돌 세상이다. 어느 채널에서든 인기 MC 자리를 도맡거나 드라마 주연을 꿰차곤 한다. 이를 보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화려한 아이돌의 삶을 꿈꾸기 쉽다. 지난달 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초등학교 4~6학년생의 40.5%는 장래 희망으로 ‘문화·예술·스포츠 전문가’를 꼽았다. 하지만 수십 명의 스타 뒤에 있는 무명 아이돌과 연습생 수천 명은 소속사·대중의 눈에 띄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무한경쟁에 노출돼 있다. ‘프로듀스 101’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소녀들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다. 성공과 실패, 갑과 을에 따른 철저한 계급 논리가 현실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다.

 이를 지켜보는 젊은 층은 ‘거울’ 같은 모습에 열광한다. 간절함을 무기로 어떻게든 도태되지 않으려는 게 자신과 비슷해서다. 외모 등에 따라 흙수저·금수저 같은 계급이 나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선지 최상위 A등급 못지않게 최하위 F등급의 연습생이 인기를 얻는다. 대중문화평론가인 김작가씨는 “소모품처럼 취급돼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돌은 젊은 세대의 비관적 현실이 녹아 들어 공감을 얻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래도 아이돌 세상은 현실 속 ‘흙수저’보다 나은 게 있다. 한 직장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D등급을 받았다 A등급으로 올라서 무대 한가운데에 선 연습생을 응원하고 있다. 현실에선 개천에서 용 나는 기회조차 없는데 화면 속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급 사다리’라도 있으니 대리만족을 하는 거다.”

정종훈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