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쓴 편지] 영화 '장화, 홍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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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에 내 이름 '수미'가 써지는 순간부터 나는 느꼈어요. 나를 만들어내는 감독님이 나에게 원한 것을. 영화 제목은 '장화, 홍련'이지만 나는 장화(薔花)의 장미에서 '미'자만 가져온, 장화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걸.

그건 동생 수연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엔, 물에 빠져 죽은 한을 품고 머리 풀어 헤친 귀신이 되는 장화.홍련보다 훨씬 예쁘고 귀여운 내 모습이 좋았어요.

전 그저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푸른 하늘을 보고 정원에 핀 꽃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소녀이고 싶었어요. 집 앞 호수에 발을 담그며 내게 펼쳐질 멋진 인생에 가슴 설레는 철부지 소녀이고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한장 한장 넘겨지는 시나리오 속에서 저는 감독님이 제게 불어넣어 주는 숨결 속에 담긴 운명을 깨달아야 했어요. "넌 상처를 입게 될 거야. 아주 치유하기 힘든. 넌 무서워하게 될 거야. 이 잔인한 세상과, 그리고 커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러나 그건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어요. 엄마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가고 아빠와 그 여자는 가까워져 가는데, 그런 더러운 일이 일어나는데 나는 미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결국 그 날(아,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끔찍한 일은 일어났고 전 아무도 지켜내지 못했어요.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죠. 너무 무서워요. '내가 거기 있을 수도 있었는데, 소중한 사람들을 구해낼 수도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거예요. 잊혀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기억들이 유령처럼 붙어 다니는 거예요. 벗어나려 애써도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거죠.

왜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겪고도 모두들 미치지 않는 거죠. 그때 모두 어디 있었던 거죠. 나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아, 내가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상처는 회복되고 흩어진 우리 가족은 화해하면서 나는 다시 행복한 아이가 될 텐데. 난 무참히 깨져버렸어요. 세상에 두 손을 들고 말아버렸죠. 그리운 사람은 혼령이 돼 내 눈 앞에 나타나고 나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중얼거리기 시작했죠.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축복일 수 있겠죠. 하지만 제게는 그건 떨쳐낼 수 없는 아픈 상처일 뿐이에요. 단단해지겠죠. 세상의 예쁜 겉모습 뒤에 가려진 무서운 진실을 봤으니까.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잊는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잘못된 선택.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했던 내 동생….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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