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신권력 ‘이모님’…설 선물 마련하고 대체휴일도 챙겨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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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회룡 기자]

#. 17개월 된 아들을 둔 ‘워킹맘’ 박모(32)씨는 설 명절을 앞두고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다. 대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그는 대체휴일인 10일에 출근조로 편성됐다.

육아 도우미 둔 엄마들의 명절 가슴앓이

그런데 ‘이모님’(육아 도우미를 지칭하는 말)이 “나도 대체휴일을 쓰겠다”고 통보해왔다. 박씨가 간곡히 부탁하자 이모님은 “휴일 수당을 주면 오겠다”고 했다. 보통 명절을 포함한 공휴일엔 육아 도우미도 쉰다.

다만 대체휴일은 아직 이렇다 하게 합의된 바가 없다. 박씨는 “이모님 채용 면접 때 대체휴일 부분을 협의하지 않았다”며 “내가 받을 휴일 근무수당을 고스란히 이모님에게 드려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 세 살 난 딸을 둔 권모(33)씨는 이모님 선물로 백화점 상품권 10만원권을 준비했다. 지난해 추석에 샴푸·린스 세트를 선물하자 이모님 반응이 떨떠름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에 ‘시세’를 물어보니 명절당 10만원어치 선물이나 현금을 드린다고 하더라”며 “부담이 되지만 겨우 마음에 드는 이모님을 만났는데 이런 걸로 마음 상하게 할 순 없지 않으냐”고 토로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육아 도우미를 둔 엄마들의 가슴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이모님’ 눈치를 보며 연휴 일정을 따라야 하는 건 물론이고 시댁과 친정 부모님께 챙기는 용돈만큼이나 이모님용 명절 선물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도우미’로 고용한 이모님들이 엄마들의 ‘상전’이 되는 가정 내 ‘권력 역전’ 탓이다. 특히 워킹맘 가정에선 이모님이 육아의 실세, ‘신(新) 권력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와 이모님의 유착 관계가 아이-엄마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워킹맘 입장에선 아이가 겨우 적응한 이모님을 쉽게 바꿀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불만이 있어도 내색하기 힘들다.

육아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종종 “아이가 조선족 이모님의 사투리를 배워 걱정이다”라는 글이 올라온다. 장난감을 ‘놀잇감’이라고 하거나 말할 때마다 ‘고조~’를 장난식으로 붙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해가 갈까봐 두려워서” “도우미를 바꾸면 아이가 적응하는 데 어려울까봐” 등의 이유로 불만을 제기하지 못한다. 이런 이모님들의 명절·생일 선물까지 챙기다 보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는 하소연이다.

권력이 역전된 이유는 ‘우수한 육아 도우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직장인 남영미(34)씨는 한 달째 ‘이모님 면접’을 보고 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 “딸(4)이 커가면서 학습도 도와줄 도우미가 필요한데, 고학력·한국인 도우미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라고 했다. 소위 ‘고스펙 이모님’, 즉 토익 900점 이상에 운전 면허까지 있는 한국인 도우미는 월 300만원을 호가한다.

이모님과 엄마들의 물밑 갈등에는 서로 이해가 부족한 상황도 작용한다. 10년 가까이 육아 도우미를 한 박모(56)씨는 “내 나이엔 육아만으로도 체력이 달리는데 집안일까지 해주길 바라는 눈치에 서운함을 느낀다”고 했다.

정희주 서울 YWCA 여성능력개발팀 부장은 “갈등을 피하려면 아이의 간식 양부터 폐쇄회로TV(CCTV) 설치 여부까지 충분히 알려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또 “육아 도우미의 휴일 등은 면접 단계에서 미리 정하고 평소 대화나 보육일지 등을 통해 충분히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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