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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미워하니까 유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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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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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논설위원

경찰은 군대가, 검찰은 경찰이, 법원은 검찰이 돼가고 있는 것일까. 지난 금요일 오후 교대역을 나와 법원 청사로 향하는 언덕길에서 물음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시위 진압이 우선인 경찰들, 하명 따라 수사하는 검사들, 점점 일사불란해지는 판사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두 개의 법정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벌써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무죄추정 원칙은 끝까지 지켜져야 한다

417호 법정. 검사들, 변호사들, 판사들이 차례로 417호 법정에 들어섰다. 잠시 후 하늘색 수의(囚衣)에 말끔하게 면도한 아서 존 패터슨(37)이 교도관들과 함께 등장했다. 패터슨은 재판장과 통역을 번갈아 보면서 판결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기자들의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법정 안에 낮게 깔렸다.

510호 법정. 회색 정장 차림의 남자가 법원 앞에서 차문을 열고 나와 자신을 기다리던 이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완구 전 총리(이하 경칭 생략)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박수 치지 마세요”라고 말한 뒤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510호 법정으로 올라갔다. 그의 뒤에서 태극기를 치켜든 이와 태극기를 막으려는 방호원이 실랑이를 벌였다.

417호 법정. 재판장은 1997년 4월 살해 현장에 있던 패터슨과 에드워드 리 중 누가 대학생 조중필(당시 22세)씨의 목과 가슴을 흉기로 찔렀고, 누가 목격자였는지, 목격자가 살인을 예상할 수 있었는지를 가지고 가능한 범행 상황을 여섯 가지로 나눴다. 이어 증거와 진술을 제시하며 경우의 수를 하나씩 지워나갔다. 처음 보는 판결 방식이다. “피고인이나 리가 범행 장면을 우연하게 목격하게 되었을 가능성은 없고…두 사람 모두 피해자를 칼로 찔렀을 가능성이 희박하며…가해자의 온몸에 피가 많이 묻게 될 가능성이 높고….”

510호 법정. 재판장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 직전 기자와 나눈 통화 내용 녹음파일과 메모, 관련자 진술의 증거능력에 대해 판단했다. “기업인으로 자수성가하여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명예를 중시하던 인물이 사망 직전 거짓말을 남긴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성완종은 당시 피고인에게 준 금액이 ‘한, 한, 한 3000만원’이라고 단 한 차례 말했을 뿐이다…100만원 이내의 금액은 아니었을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완종 측근들이 진술하는) 금품 포장 상태에 비추어 3000만원 미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417호 법정. 무죄를 유죄로 하는 것도, 유죄를 무죄로 하는 것도 소름 끼치는 오판(誤判)이다. 그래서 법률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스스로의 확신이다. 97년의 검사는 리의 단독 범행으로 기소했고 1심과 2심도 유죄를 선고했다. 2016년의 판사들이 말하는 증거와 진술을 그때 그 검사, 판사들은 왜 무시했던 것일까. 성난 여론 속에 결론부터 내놓고 증거를 고르고 이유를 붙였던 건 아닐까.

510호 법정. 나는 이완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성완종이 이완구에게 돈을 건넸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돈 전달 과정을 직접 본 목격자는 없다. 그렇다면 증거의 그물망이 더욱 더 촘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 1심이 끝났을 뿐인데 왜 사죄하지 않느냐고, “목숨을 내놓겠다” 하지 않았냐고 돌을 던지는 건 성급하고 섬뜩하다.

두 법정 사이. 정의는 집행되어야 한다. 다만 ‘모두가 유죄라고 믿으니까, 모두가 미워하니까 유죄’라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증명됐으니까 유죄’여야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무너지면 당신도, 나도 유죄추정의 피해자, 잠재적 피의자일 뿐이다.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까지는 방어권을 빼앗아선 안 된다. 같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2심과 3심에서 보다 엄격한 증거법에 따라 가려야 하고, 검찰은 더 집요하게 증거를 보강해야 하고, 변호인은 더 치열하게 의뢰인을 변호해야 한다.

그날, 기자들과 카메라와 구경꾼의 밀물이 빠져나간 법원 앞을 재판 받은 사람들과 재판 받을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래. 우린 우리가 인간의 법정에서 재판하고 재판 받는다는 사실을 잊곤 하지. 가로수에 조용히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