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낸 이성복 시인, 후배 문태준씨와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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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80년 아버지로 대표되는 권력, 세상과의 불화를 낯선 시어, 초현실주의적인 연상 등을 통해 드러낸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펴내 문단에 충격을 줬던 시인 이성복(51.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씨가 다섯번째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을 출간하고 지난 27일 서울을 찾았다. 이씨의 새 시집 출간은 93년 이후 10년 만이다.

서울에 근거를 둔 문단 선.후배들과 만남 등 바쁜 일정 중간에 이씨는 후배 시인들 중 작품이 눈길을 붙들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문태준(33)씨와 처음 대면했다.

"80년대 시적인 화두로 치욕을 꺼내, 참여시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시의 생명력을 이끈 선배""대부분의 시인들이 80년대 시적 감수성을 빚진 선배"로 이씨를 평가하는 문씨도 이씨를 만나 새 시집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보는 자리는 설렜다.

장맛비가 추적거리는 날 홍대 앞 카페골목에서 만나 인사를 튼 이씨와 문씨는 서로에 대한 덕담부터 꺼냈다.

"개인적으로 문씨를 전혀 몰랐는데 대구에 있는 문인수.장옥관 시인들이 '문씨 시가 좋다. 읽어 보라'고 해서 알게 됐다. 문씨 시에는 상처 같은 것들이 있는데, 노출돼 피 흐르는 게 아니고 얌전하게 껍질이 앉은 듯한 모습, 그런 점이 마음에 와 닿았다."

20년 선배의 급습 같은 칭찬에 문씨의 볼이 조금 상기됐다. 그러면서 그는 강원도 화천에서 군 복무하던 시절 '뒹구는…''남해금산'같은 시집들을 아껴 읽다가 검열이 나오면 탄약통에 담아 땅속에 묻어뒀었다며 과거 이씨 시에 대한 짝사랑을 고백했다. 덕분에 시집은 물기를 먹어 누렇게 바랬고, 문씨는 누런 시집들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문씨 시에 대한 이씨의 칭찬은 '시론'으로 넘어갔다. "시적인, 시 비슷한 것은 많아도 시와는 다른 것이다. 시에는 80%가 없다. 비등점이랄까, 그런 순간에 나오는 것이다. 발아되느냐, 되지 않느냐이지, '발아됨직하다'같은 정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비등점에 올라타는 것은 아무나 할수 없다. 거기에 쉽게 올라타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씨는 어느 편일까. 문씨가 묻자 이씨는 "나는 문학을 카프카로부터 배웠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괴롭혀 작품을 만들어 낸 경우다. 내 경우도 괴롭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머릿 속에 입력이 되어 있지 않다. 대학 시절 괴로울 때가 너무 많았다. 그 상태에서 중얼거리듯 시를 썼다. 요즘은 시 쓰는 일이 형벌이라기 보다는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이씨는 문씨가 "어떤 시상이 들어오면 메모하고 묵혀 두었다가 양수가 터지듯 말들이 쏟아질 때 집중적으로 시를 쓰곤 한다"고 창작 과정을 소개하자 "그런 게 시 쓰는 재미일 것"이라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씨는 "이번 시집을 구성하는 네개의 기둥은 생과 사, 성(性)과 식(食)"이라고 소개했다. 3부로 나뉜 시집의 1부 제목으로 붙인 '물집'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해가는, 색(色) 자체인 삶을 사람들이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집 3부 '진흙천국'에서 다룬 '가상임신''백치임신' 등 극단적인 경우를 통해서 고통스러운 삶의 진실에 도달하곤 한다는 것이다.

'색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관념이 개입해 환상이 생기는 게 문제'라는, 다분히 불교적인 설명은 시 문답을 한동안 불교적인 주제로 끌고 갔다. 불교방송에서 불경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문씨와 이씨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의 개념, 위파사나 등 불교 얘기에 빠져 들었다.

문씨는 "첫 시집에서 시대와의 불화를 표출했던 이선생의 시 세계가 다분히 실존적인 쪽으로 이동한 것 같다"며 "내밀함이 꽉 찼을 때 시를 쓰는 선생의 시작 태도는 시를 가장 온전하게 모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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