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게들의 보름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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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이진우(1965~) '게들의 보름달' 부분

세상을 메운 달빛, 달빛들 때문에
집을 잃은 사람들이 웅크리고 잠든 골목도 편치 못하다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다
단 하루라도 편히 잠들고 싶은 고단한 삶

보름달이 뜨면
어둠에 익숙한 세상은 오히려 불편하다
어둠이 찾아와야 제 빛을 내는 사소한 것들이 있다
사소함이 전부인 것들이 있다
차에 깔려 속이 터진 게들의 잔해가
초록 신호등보다 선명하다

보름달이 뜬 밤,
세상은 핏기 가신 얼굴이다



여자와 은밀하게 보내기 위해 밝은 달을 피한 적은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름달이 뜨면 세상이 어둡다는 말을 할 수가 있지? 그렇구나, 노숙자들은 밝은 밤이 부끄러울 테지. 어둠에 익숙한 삶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지. 밝을수록 핏기가 가시는 얼굴도 있는 거지. 어두워야 제 빛을 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잊었다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보름달이 뜨면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지?

박덕규<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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