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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출판사 첫 책] 문예출판사 '데미안' (19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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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출판사가 첫 책에 쏟는 정성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할 터이다. 지식산업의 일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자부심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첫 책에는 어떤 의미와 에피소드가 숨어있을까. ‘우리 출판사 첫 책’코너를 통해 과거의 기록을 찾아나선다. 간혹 막 새로 출발한 신생 출판사의 첫 책에 얽힌 얘기도 찾아 나설 예정이다. 편집자

문예출판사가 1966년 회사를 설립한 직후 1호로 내놓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당대 최고의 인기 수필가로 1년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을 언급해야 한다.

1966년에 발표된 그녀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독일의 전몰 학도들의 배낭 속에서 꼭 발견되는 책''데미안을 읽고 자살한 친구 무덤에 이 책을 함께 묻었다'는 대목이 독자들의 관심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이 서점에 찾아와 '데미안'을 내놓으라고 야단법석이었지만 서점에서는 10여년 전에 아동문학가 김요섭(1997년 작고)이 영웅출판사에서 '젊은 날의 고뇌'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책이 버젖이 서가에 꽂혀 있는데도 몰라 못 팔고 있었다.

그때 진명문화사에서 막 독립하여 출판사를 차린 전병석(사진) 사장이 이 사실을 알고 김요섭씨를 찾아 원고를 사들였다. 당시 지급한 원고료는 2만원.

'데미안'의 정가가 2백80원이었으니 출판사쪽에서는 그저 얻었다고 할 수 있으나 영웅출판사에서 원고료도 제대로 못챙긴 김씨로선 뜻밖의 횡재였던 셈이다.

전사장이 출판 초 도입한 마케팅 기법이 주효했다. 경기.이화.진명 여고 등 유명 고등학교 국어담당 교사들에게 책을 10여권씩 기증했고, 학원가를 찾아 학생들에게 돈을 주며 '데미안'을 사보라고 해 서점으로 끌어들였다.

'데미안'은 5천부 넘으면 베스트셀러 되던 그 시절에 1년만에 5만부나 팔렸다. 지금 팔리고 있는 문예출판사의 '데미안'은 1974년 한글세대를 겨냥해 독문학자 구기성씨(2003년 1월 작고)가 새로운 감각으로 번역한 것이다.

자아에 눈떠가며 방황하는 젊은이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해 성장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이 인연으로 문예출판사는 계속 문학출판으로 남았다. 전사장은 "교과서나 학습참고서, 전집물이 판을 치던 당시 출판계에 문학서 붐을 일으킨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청소년 독자층이 두터워질 날은 그 언제나 오려나. 출판 불황에 주름살이 더욱 깊어졌을 문예출판사의 전 사장이 '데미안'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웃음꽃을 피웠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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