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놓친 버스에 대한 아쉬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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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버스 지나가고 손드는 격이지만 다음 버스(!)를 위해 이 글을 쓴다. 특검 기한 연장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는 그 반대 결과를 바랐던 사람들에게 지나간 버스가 돼버렸고, 나도 그들 중의 하나다.

내가 특검 연장을 바란 것은 현대그룹에서 나왔다는 문제의 1백50억원이 누구한테 가고 어떻게 쓰였느냐 따위의 탐정 소설적(?) 흥미와 조바심 때문이 아니다. 한층 의젓한 것이다.

*** 특검이 과연 남북관계 해쳤나

특검 연장의 반대 명분은 무엇보다 남북 관계에 미칠 영향이었다. 나라와 나라의 외교에는 감출 것도 있고 덮어둘 것도 있는데 무조건 까발리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하물며 나라와 '반국가단체'의 교섭에서야. 그러나 그것이 진짜로 맞으려면 다음 두 질문에 답해야 한다. 먼저 송두환 특검이 남북관계를 얼마나 해쳤느냐는 점이다. 특검 조사가 없었다면 남북관계가 훨씬 나아졌을 것인가? 근자의 한반도 정세로 보아 그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그리고 밝힌 것 이상 밝혀서는 안될 어떤 비밀이 또 있느냐는 점이다. 그런 것이 있지만 국익을 위해 묻지 말라면, 궁금증 몸살은 날망정 백성의 도리로 따르는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으니 캐지 말라는 막무가내 말씀은 받들기 어렵다. 아무 것이 없지도 않았지만, 아무 것도 없으면 가릴 이유가 없잖은가?

내막은 명분과 또 다르다. 특검이든 특검 연장이든 민주당 구주류가 반대한 것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의리 차원에서라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신당 창당으로 분가를 모색하는 신주류가 합세한 것은 요령부득이다. DJ 조사에 반발할 호남 정서를-표를-고려한 결과라는 해석이 있으나, 과연 호남 주민들이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다한 조사마저 반대하는 것인지, 반대한다고 밀어붙이는 것인지 나로서는 적잖이 의문이다.

서면 조사니 방문 조사니 얘기가 나오자 그럴 것 없이 아예 특검 출두 '정공법'을 쓰자고 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DJ는 특검 조사에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과 어긋나는 측근들의 말 역시 거짓말이냐 충성이냐의 판단은 특검과 더불어 국민의 몫이다.

개혁은 현 정권의 애창곡이다. 저마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 '코드'에 맞추려는 노력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신당은 개혁이 목적입니다. 지역 구도를 해소해 정치 개혁을 화끈하게 하자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월간중앙 7월호)라는 어느 의원의 말은 크게 이상하다.

지역 구도 해소가 개혁이라면서 사실은 호남 민심이라는 지역 구도를 배경으로 개혁 깃발을 흔들기 때문이다. 설사 호남 주민들이 DJ 조사에 반대하더라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설득하는 것이 지역 구도 해소를 통한 개혁 아니겠는가? 덮어두면 개혁이고 밝혀내면 수구라는 등식도 황당하지만, 반대 명분은 사실이 아니고 내막은 전혀 개혁적이지 않았다.

지나간 버스에 대한 나의 원망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매듭없는 혼란의 위험이다. 세상의 어떤 논란을 끝내야 할 경우 그것을 끝낼 장치가 필요하다. 사약 사발을 앞세운 어명도 있고, 복종 아니면 파문이라는 교회의 권위적(ex cathedra) 선언도 있다.

왕과 하느님 '빽'은 없으나 나는 특검의 용도가 이것이라고 믿는다. 특검 수사로 의혹과 논란은 일단 종지부를 찍어야지, 특검이 부실하여 '초특검'을 부른다면 그런 낭비와 코미디가 없다. 야당의 재특검 공세와 대통령의 거부권 시사가 벌써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 의혹.논란 확실히 매듭 지어야

다른 하나는 남북 거래의 투명성 회복 실패다. 왕년의 D재벌 K회장이 '입북료' 선례를 만들었을 때, 정보 당국이 눈치채고 손대려 했었으나 정치가 막았다. 이어 뒷돈 거래는 관행이 되고 단가는 점점 올라갔다. 남북 교섭은 당연히 음습할 것이라는 짐작이 자리잡았고, 그 짐작대로 상당히 음습해도 캐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굳어졌다.

참 고마운 짐작이고, 참 편리한 탈선이었다. 이번 특검을 계기로 음습하고 싶어도 더는 음습할 수 없는 사정을 저쪽이 분명히 깨닫도록 했어야 했다. 버스를 놓친 사람이 너무 많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