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발한 발의는 긍정적 … ‘보여주기’ 행태에 국회 병목 부작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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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들의 법안 발의가 활발하다는 건 국회 기능이 원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방증이어서 일단 바람직한 현상이다. 국회가 ‘통법부(通法府·행정부가 제출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역할만 한다는 의미)’로 조롱 받던 군사정권 시절엔 정부 발의 입법이 의원 입법보다 훨씬 많았다. 14대 국회의 경우 정부 입법은 의원 입법의 1.6배에 달했다. 이러한 추세는 15대 국회 이후 역전되기 시작해 19대에선 의원 발의 법안이 정부 발의 법안의 23배를 넘어섰다.


그러나 법안 발의가 수적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수준이 떨어지는 법안이 양산되면서 입법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지현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시민감시팀장은 “무조건 법안을 많이 발의해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그릇된 통념이 이런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법안 발의로만 의원을 평가하는 각 정당의 움직임도 이런 추세를 부추기고 있다. 여야는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시스템 공천’을 한다는 이유로 법안 발의 건수를 현역 의원 의정활동 평가의 주요 지표로 삼았다. 그러자 19대 국회에 입성한 의원들은 곧바로 ‘입법 러시’에 들어갔다. 개원 50일 만에 1161건의 법안이 접수되는 단일 기간 신기록도 세웠다. 이 기간에 발의된 법안 중 3분의 1은 18대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던 법안을 그대로 ‘재탕’한 법안이었다. 20대 총선 공천에서도 여야가 법안 발의를 포함한 의정활동 평가로 현역 의원들을 물갈이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이런 현상은 계속될 전망이다.


외국은 어떨까. 국회 입법조사처의 전진영 조사관은 “미국에선 의원들이 지역구 관련 법안을 많이 발의하기 때문에 가결률이 5%도 안 된다. 반면 불문법 전통이 강한 의원내각제의 영국에선 4년 임기 중 의회 전체가 처리한 법안 수가 100건도 채 안 된다”고 설명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교수는 “독일은 임기 4년 동안 의원 1명당 발의 법안 수가 3건이 안 되고 미국은 우리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양으로 실적을 올리기보다 질적 제고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의원 수를 늘리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자동 폐기 법안을 줄이기 위한 해법은 다양했다. 이상민 법사위원장은 “임기 막판에 몰아치기 식으로 법안을 처리해온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국회 회기 중에 주 5일 국회의사당 상주를 의무화하는 국회 상주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무더기 발의-임기 만료 폐기’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의정활동 평가기준을 법안 발의에서 입법 성공률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지현 팀장은 “의원이 법안 발의 이전 당의 입장과 의견 조율을 거치기만 해도 법안 통과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복경 교수는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를 없애 입법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며 “상임위 동등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 중에서 상임위 법안 심사 후 법사위의 ‘검사’를 받아야 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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