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에 만난 선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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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호 34면

그날은 아침부터 몸이 안 좋았다. 3일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새벽에 기침 때문에 깬 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숨이 얕고 거칠었다. 천식이 도진 것이다. 겨우 출근했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날카로웠다. 6시가 되면 바로 퇴근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8시가 다 되어 갈 무렵에는 살짝 현기증이 나 의자에 기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25년 만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선배다. 선배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문학을 좋아한다는 인연으로 알고 지냈다. 그러다 대학 다닐 무렵 더 가까워져 자주 뭉쳤다. 득아, 잘 지내지? 나 지금 서울인데 얼굴 한번 볼 수 있겠지? 봐야지요. 어딥니까? 지금은 명동인데 성수로 이동할 거야. 그쪽으로 오렴. 선배는 이미 전작이 있었는지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졌다.


선배가 있다는 곳은 성수역 근처의 노래방이었다. 노래방이라니, 25년 만에 만나는데, 나는 아직 저녁도 먹지 못했는데, 선술집도 아니고 커피숍도 아니고 어째서 노래방이란 말인가? 나를 만나면 꼭 불러야 할 노래라도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일행이 있는지도 모른다. 일행과 어울려 밥과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러 가는 길에 문득 내 생각이 난 건지 모른다. 실종된 시체처럼 25년 전의 일들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 아닐까.


노래방은 지하에 있었다. 어둡고 춥고 허름했다. 열 명은 앉아도 될 것 같은 방에는 선배와 선배의 일행 한 명이 있었다. 선배는 나를 반갑게 맞았다. 나는 장소도 상황도 모두 뜻밖이라 어색하게 인사했다.


선배의 일행은 드라마 ‘송곳’에 나오는, 항상 ‘허벌나게 조져불자’가 적힌 노조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버스회사 노조원을 닮았다. 선배는 그를 사업상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선배가 ‘조져불자’에게 나도 소개 시켜주면 좋았겠으나 그러지 않았다. 내가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자 조져불자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유.


선배는 말을 잘한다. 말씀의 바다, 말씀의 블랙홀. 한번 거기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우리끼리만 하는 것 같아 조져불자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유. 선배는 말하고 나는 들었다. 득아,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많이 미안하다. 그동안 연락도 못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선배는 자꾸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사업을 했다. 꽤 크게 하고 있다. 오늘도 명동에서 일을 보고 왔다. 내일도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 있다. 며칠 뒤에는 중국에 출장을 가야 한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조져불자는 언제부터였는지 자불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노래방 안은 더 추웠다. 옷을 잔뜩 껴입은 나도 으슬으슬 추웠는데 선배는 달랑 양복만 입고도 전혀 안 춥다고 말했다. 파랗게 질린 입술로 원래 자기는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다고 다리를 꼬고 앉아 몸을 떨면서 말했다. 그렇게 떨면서 차가운 캔맥주를 마셨다. 천정의 조명 때문에 오색 불빛과 그림자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말하다 선배는 자꾸만 감정이 격해지는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득아, 득아 부르고 그러면 자다가 깬 조져불자는 선배에게 물었다. 어딜 자꾸 드가라는 거냐?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지만 어쩌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배는 나보고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나는 안 쓴지, 아니 못 쓴지 25년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선배는 이제 시를 쓰라고, 당장 시를 쓰라고, 나는 못한다고, 나는 끝났다고, 선배는 아니라고, 너는 쓸 수 있다고, 너는 써야만 한다고, 이 시대의 진실을 노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몇 번인가 선배는 눈을 훔쳤다. 예전에 이런 시를 썼지 않았느냐고 몇 구절을 외우기까지 했다.


노래방에서 나왔을 때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눈은 쌓이지 못하고 금세 녹아 없어졌다. 전철 역 앞에서 헤어질 때 선배는 몇 번이나 나를 껴안았다. 시를 써야 해. 꼭 써야 한다. 선배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안다. 그 말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란 것을. 노래방에서 선배가 외었던 시들은 모두 25년 전에 자신이 썼던 시 구절들이었다. 한강을 건너는 전철 창밖에는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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