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中企 죽이는 '노동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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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작금에 이어지고 있는 파업은 이제 그 도를 넘어 하나의 큰 '호황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웬만한 대기업이 노조 때문에 써야 하는 비용은 '직접비'만 10억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이런 회사들 1천개만 모아도 '파업산업(罷業産業)'의 시장 규모는 1조원이 넘는다.

여기에 직접비와는 비교도 안되게 큰 간접비까지 감안하면 파업과 이에 연관된 '파업시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요공급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얼굴없는' 노동 귀족들이 파업시장에 큰 재벌그룹같은 회사를 차려놓고 군림할 수 있는 토양과 여건은 이미 충분히 배양되어 있는 셈이다.

그 많은 머리띠와 깃발, 현수막 제조는 어떤 제조업자에게 맡겨지는 것일까. 무대 설치와 주변 분위기 조성, 그리고 음향 극대화를 위한 대형 오디오와 스피커 조작, 백 뮤직까지 노조가 '직접' 담당하기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노동 귀족들이 '아웃 소싱'을 떠 올려 볼만한 대목이다. 이런 작업을 떠맡아 줄 이벤트회사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노동귀족들은 그저 영화에 나오는 스타들처럼 TV카메라에 그 모습만 한번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한국의 파업산업은 순풍에 돛을 단 격이다. 노무현 정부의 '친노(親勞)'라는 큰 배경(?)까지 확보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중소 제조업이 중국의 '저임(低賃) 인해전술'에 죽어가고 있는 사이 파업산업은 '나홀로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소외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신장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귀족들이 벌이고 있는 파업이야말로 '그늘지고 소외된 곳'에서 일하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그 일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빚고 있다.

한국경영연구원이 최근 유창무 중소기업청장을 초청, '참여정부의 중소 벤처기업 정책방향'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듣는 자리에서 한 중소기업인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노조와 주주, 그리고 소비자들로부터 (더 달라는) 끊임없는 압력을 받고 있다.

이런 '삼각 압력'하에서 CEO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중소 하청업체 납품가격을 후려치는 자구책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조의 파업이 그렇지 않아도 빈사상태에 빠진 중소기업과 이에 속해있는 근로자들을 '죽음과 삶의 경계'로 내모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동 귀족들이 무대 위에서 '더 달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이 아무런 대응책을 갖지 못한 중소기업과 이에 속한 식솔들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현장을 목도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은행 공공부문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이제 웬만큼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중소기업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한국경영연구원 세미나에 참석했던 또 다른 중소기업인은 "카드사 신입사원의 초임은 3천2백만원이다. 중소기업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인력난은 가히 재난이라 할 만한 상황이다."고 한탄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인은 "주5일 근무제는 대기업부터 실시한다는 정부의 '잔머리' 발표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대기업으로 옮겨야겠다는 의지만 증폭시킨 조치였다"고 힐난했다.

"나라 경제가 정말 암울하다. 정부는 기업 못해먹겠다는 절규를 가볍게 듣지 말아야 한다. 중소 하청업체의 탯줄 역할을 하는 모기업들의 '탈출 러시'는 이미 이어지고 있으며 탯줄이 끊긴 중소기업은 하나 둘씩 고사하고 있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한국경영연구원 세미나 분위기를 한마디로 요약한 자조는 "여기서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한 중소기업인의 탄식이었다.

양봉진 세종대 경영대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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