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닫힌 마음 열었다, 법원이 이어준 가족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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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춘천시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소나기 가족사랑캠프’에서 학생과 부모들이 강사의 진행에 따라 팀장을 선정하고 있다. 재판을 앞둔 학생들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사진 춘천청소년꿈키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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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50세 엄마가 소리쳤다. “술 좀 그만 마셔, 인간아!” 그러자 아빠 역할을 맡은 대학생이 맞받아쳤다. “내가 술을 마시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춘천지법, 소년 재판 앞둔 9명 캠프
“미안해, 미처 몰랐어” 함께 울음
부모도 참여해 가정생활 상황극
“아이들 비행은 가정 문제 연관 많아”
집으로 돌려보낼지 사전 평가 자리

 계속 오고가는 고성. 15세 딸의 대역은 얼굴을 찡그리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무대 위에 있던 엄마 이모(50)씨는 대사를 잊은 채 구석에 서 있는 진짜 딸 최모(15)양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더니 다가와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우리 딸. 엄마가 미처 몰랐어.” 그 말에 최양 역시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21일 강원도 춘천시 KT&G 상상마당. 최양을 비롯해 소년(10~19세) 재판을 앞둔 9명의 가족이 모였다. 춘천지법과 춘천청소년꿈키움센터가 주최한 ‘소나기(소통·나눔·기쁨) 가족사랑캠프’ 참가자들이다. 가정의 보살핌이 부족해 일시적으로 비행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는 청소년이 대상이다. 그런 청소년과 가족을 모아 서로 마음을 터놓도록 하는 자리다. 춘천지법 이희경 판사는 “아이들을 처벌하기보다 가족과 학교에 돌아갈 수 있도록, 가정 환경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개선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캠프”라고 설명했다.

 최양은 지난 5월 술과 음식을 훔쳤다가 캠프에 참가하게 됐다. 사회자는 최양에게 가정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를 묻고, 어머니가 직접 무대에 오르도록 해 상황극을 꾸몄다. 청소년과 부모가 서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이해하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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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바이를 훔친 윤모(17)군의 환경도 최양과 비슷했다. 아빠는 일에 지쳐 매일 술을 마시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못마땅해 했다. 상황극에서 아빠와 엄마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윤군은 그런 부모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상황극이 끝난 뒤 아버지(56)는 가족에게 약속했다. “퇴근하면 바로 집에 올게. 술은 절대 1주일에 두 번 이상 안 마실게.” 윤군도 답했다. “아빠, 다신 실수 안 할게요.”

 다음은 오토바이 무면허 운전을 한 김모(16)군 차례였다. 김군은 이불을 덮고 누워 있고, 엄마 장모(42)씨가 의자에 앉아 아들을 쳐다봤다. 대화는 없었다. 엄마는 “아들을 요즘 매일 볼 수 있어 다행”이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집에만 들어와도 좋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아들은 어색한듯 나지막히 말했다. “엄마 사랑해.” 그리고 이어진 말. “집에 일찍 들어가고 학교에도 제시간에 갈 거예요.” 김군 가족은 2~3일에 한 번씩 서로를 꼭 안아주기로 약속했다. 21일 저녁, 청소년들은 부모의 발을 씻겨 드렸다. 캠프는 22일까지 1박2일간 이어졌다. 이틀째인 22일 청소년들은 각자 소감문을 써서 발표했다. “가장 소중한 공간인 가정,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 착실하게 살겠다”는 내용들이었다.

 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은 26일부터 춘천지법에서 소년 재판을 받는다. 이번 캠프에는 춘천지법 소속 판사와 조사관 등이 참여해 학생들을 가정에 돌려보내는 게 적절할지를 평가했다. 이 평가는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에게 전달됐다. 유상운 춘천청소년꿈키움센터장은 “아이들의 비행은 대부분 가정 문제과 연관돼 있다”며 “가족 간의 소통법과 표현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청소년들의 비행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춘천=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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