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비 치는 南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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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형렬(1954~) '비 치는 南道' 전문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났다
남의 집 처마 밑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 내리는 비를 내다본다
떠나가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빗방울이 발등에 떨어지고
한번씩 휘익 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빗방울 가루가 가슴에 후드득 뿌린다
새삼 저는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 가는가 어인 일로
기다리듯 기웃기웃 저쪽을 내다본다
문 닫힌 가게 하나가 간신히 보이고
미루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자동차도 지나가지 않고 비만 지나간다
비는 이내 그칠 것 같지 않고
방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나는 얼마만의 나그네인가



부대끼는 일이 싫어 혼자가 되어 보지만, 이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인적 드문 곳을 부러 찾아가서는 사람 보고 반가워서 밤새 음주한다. 왕자도 귀족도 아니면서 바쁜 일로 얽히고 설키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심심한 걸 심심하게 견뎌낸 자가 부자다. '나그네'가 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자유의 세계를 얻는다.

박덕규<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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