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갈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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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마종기(1939~) '갈대' 전문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을숙도 갈대밭 찾던 기억, 난다.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외로운 자에게도 연인들에게도 마음의 이불이 되어 주었다. 그게, '죽음의 전염'을 막는 '더불어 사는 지혜'의 결과라고 하니, 참 그럴싸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은 허리에 감춘다'고 빗대니, 멋진 세태 풍자도 된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함께 잘 사는 세상은, 같은 키로 서로 머리 맞대는 시간이 없으면 오지 않는다.

박덕규<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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