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리포트] '어제'는 빨리 털고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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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외국에 며칠 다녀 왔다.

좋았다.

음식이 맛있거나 경관이 수려하거나 조용해서 좋았던 게 아니다.

음식은 입에 맞지 않고 거무죽죽한 건물에 거리의 소음은 우리보다 더했다. 그런데도 좋았다.

오래간만에 세상사 다 잊고, 하러 간 일에 또 혼자만의 생각에 푹 빠질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귀국길 비행기에 오르면서 우리 신문들을 집어드는 순간부터 그 좋던 기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변함없이 우리 신문들은 누가 과거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등의 소식으로 넘치고 있었다.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나라 밖에서 접하다 보면 마치 우리나라가 행정부도 정치권도, 큰 기업도 작은 기업도, CEO부터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썩고 불법이나 저지르는 나라 같은 생각이 절로 든다.

이제는 지친다.

허구한 날 옛날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찧는 것도, 또 그걸 듣고 있는 것도 이제는 지친다.

언제 일인데 아직도 김우중씨 얘기를 하는 건지, 어느 대선 때 얘긴데 지금까지도 '세풍'사건이 처리되지 않고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언제까지 대북송금 어쩌구저쩌구 하고 있을 건지.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건가. 그만하면 지겨울 만하기도 한데….

'오늘 우리의 모자람'을 따지기보다 '어제 남의 잘못'을 두고두고 곱씹는 걸 보면 우리가 집단자학증에 빠진 건 아닐까 절로 걱정된다.

'잃어버린 10년'에 무엇이 문제이고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서로가 남의 탓만 하다가 지금의 수렁에 빠진 일본을 우리가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어제의 우리는 오늘 같지 않았다.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었던 우리의 경제발전을 두고 남들이 '압축성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오늘 우리의 모자람을 내일을 위한 능력과 투자로 채웠기에, 과거의 잘못을 되씹기보다는 훌훌 털고 일어나 더 나은 내일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기에 그런 발전이 가능했던 게다.

지금 우리는 한국 경제의 그 뿌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여유가 없다. 우리를 딛고 넘어서려는 중국이 걱정스럽지도 않은가. '동북아 경제중심'을 일궈낼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의 어두운 구석을 샅샅이 밝히되 빨리 바꿔 나가자는 얘기다. 어제의 일 중에 오늘 털 것은 털고 넘어가자는 말이다. 그래야 내일을 준비할 게 아닌가.

김정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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