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소송'으로 이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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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절도범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준 은행이 '나 홀로 소송'을 벌인 고객에게 인출된 돈과 위자료를 물어주게 됐다.

회사원 李모(35.여)씨는 2002년 5월 점심시간에 지갑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신용카드가 든 지갑을 도난당했다. 사무실이 빈 틈을 타 침입한 상습절도범 金모(43)씨가 가져간 것이다.

李씨는 그날 오후 3시쯤 주택은행에 카드 분실신고를 했지만 金씨는 이미 현금인출기에서 李씨의 예금 2백만원과 현금서비스 2백10만원을 빼내간 뒤였다. 金씨는 그해 9월 회사빌딩 사무실 등에서 상습적으로 지갑을 훔친 혐의(절도)로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金씨는 "본점 직원을 사칭해 전화했더니 은행 지점에서 별다른 신원 확인 절차 없이 李씨 카드의 비밀번호를 알려줬다"고 진술했다.

이를 알게 된 李씨는 은행을 찾아가 따졌으나 은행측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당신이 돈을 인출해간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李씨는 올해 3월 주택은행을 합병한 국민은행을 상대로 변호사 도움 없이 혼자 소송을 냈지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면 金씨의 증언이 필수적이었다.

李씨가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金씨를 여러 차례 찾아가 설득한 끝에 마침내 金씨가 증인으로 나섰다.

19일 서울지법 민사3단독 김용배(金容培)판사는 "신분 확인도 않고 경솔하게 비밀번호를 유출한 은행의 책임이 인정된다"며 "李씨에게 인출된 돈 4백10만원과 위자료 등 4백97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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