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의 가을 야구 뒤엔 아내 하원미의 보이지 않는 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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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호 23면

추신수가 10일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승리한 후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이날 2번타자?겸 우익수로 출전한 추신수는 안타와 타점 1개씩을 기록하며 팀 승리를 도왔다. [토론토 AP=뉴시스]

‘추추트레인’ 추신수(33·텍사스 레인저스)가 멋진 가을을 보내고 있다. 추신수는 10일(한국시간) 캐나다 토론토 로저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디비전시리즈 2차전 2번타자로 나서 안타와 타점 1개씩을 기록했다. 연장 14회 끝에 6-4로 이기고 시리즈 2연승을 달린 텍사스는 남은 3경기 중 1승만 추가하면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 진출한다.


추신수는 한국인 타자 최초로 리그 챔피언십 무대를 밟을 가능성이 커졌다. 4월만 해도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과 몇 달 만에 야구인생의 하이라이트를 맞고 있다.

추 "아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추신수는 지난 5일 LA 에인절스를 꺾고 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확정한 뒤 한국 취재진에게 말했다. “아내는 나무같이 묵묵히 나를 지켜봐줬다. 아내가 없었다면 난 여기에 올 수 없었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여자다.”


동갑내기 아내 하원미 씨는 추신수에게 안락한 그늘을 만들어준 나무다. 든든하게 곁을 지켜준 나무다. 지난 7월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남편에게 나무가 속삭였다.


“인생은 건물과 같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건물을 아주 빨리, 높게 짓는다. 그건 기반이 약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래 위에 건물을 세운다. 그건 무너진다. 당신은 지금까지 튼튼한 건물을 세웠다. 그래서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부산고 졸업 후 홀로 미국으로 건너와 7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이겨낸 추신수가 꼭 재기할 수 있다는 격려였다. 이 한마디로 아내는 남편을 일으켜 세웠다.


2013년 말 추신수는 자유계약선수(FA)가 되어 7년 총액 1억3000만 달러(약 1500억원)에 텍사스와 계약했다. 아시아 선수로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액 계약이었다. 지난해 8월 텍사스가 포스트시즌 경쟁에서 탈락하자 추신수는 일찌감치 2015년을 준비하기 위해 왼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수년간 누적된 부상을 털어내고 2015년엔 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올해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빠른 공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선구안이 흔들렸다. 4월을 마쳤을 때 그의 타율은 0.096까지 떨어졌다. 메이저리그 전체 선수 중 타율이 최하위였다.


추신수는 20홈런과 20도루, 그리고 4할 가까운 출루율을 기록할 수 있는 만능선수다. 그 기반은 3할 타율이다. 타율이 안정적이어야 볼넷을 얻고, 도루 기회도 얻는다. 특별한 부상이 없는데 1할 타율에도 미치지 못한 현실을 추신수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했다. 잔인한 4월이었다.


그러다 제프 배니스터(50) 텍사스 감독과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6월10일 경기에서 배니스터 감독이 우익수 추신수의 송구 판단에 강한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더그아웃에서 추신수를 불러 세워 잘못을 따졌다. 추신수는 “나 때문에 졌다는 것이냐”고 맞받아쳤다. 경기 후 추신수는 미국 기자들에게 “글러브를 줄 테니 (감독이) 직접 해보라”고까지 했다. 자기 표현이 자유롭고 조직문화가 수평적인 메이저리그에서도 이례적인 갈등 표출이었다.


올해 처음 빅리그 감독이 된 배니스터는 다혈질에다 원칙 없는 선수 기용 탓에 현지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렇다 해도 감독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선수에게 좋지 않다. 게다가 추신수가 워낙 부진할 때였다. 이후 배니스터 감독은 상대 팀이 왼손 투수를 선발로 내면 왼손 타자 추신수를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했다. 그를 ‘반쪽 선수’로 취급한 것이다. 전반기 80경기에서 그는 타율 0.221, 홈런 11개를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승격 8년 만에 경험한 최악의 위기였다.


그러나 추신수는 여름부터 멋지게 반등했다. 7월 21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한 경기에서 단타-2루타-3루타-홈런을 모두 쳐내는 것)를 기록하더니 후반기 69경기에서 타율 0.343, 홈런 11개를 기록했다. 특히 9월과 10월 타율 0.404, 출루율 0.515, 홈런 5개, 20타점을 기록한 추신수는 빅리그 데뷔 두 번째로 ‘이달의 선수’로 선정됐다.


팀 단장 "선수 상대 강연 맡기고 싶다"시즌 초 부진을 딛고 추신수는 0.276의 타율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홈런은 개인 최다 타이인 22개를 쳐냈다. 무엇보다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킨 게 추신수의 진가를 증명했다. 전반기 42승 46패에 그쳤던 텍사스는 후반기 46승 28패를 기록하며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존 대니얼스(38) 텍사스 단장은 “추신수가 출루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보라. 추신수는 팀의 역동성을 바꿔놓는다”고 극찬했다.


대니얼스 단장은 앞선 7일 댈러스 모닝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추신수의 아내가 우리 팀 전체를 대상으로 연설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추신수의 야구는 탄탄한 기반 위에 만들어졌다는 아내의 조언에 대니얼스 단장도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둘은 지난 2002년 소개팅을 통해 만났다. 추신수가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불 같은 사랑을 했다. 2003년 하씨가 미국으로 건너가 둘의 결혼생활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사랑은 냉엄한 현실 앞에 놓였다. 끼니를 걱정할 만큼 힘든 마이너리그 생활이 이어지자 추신수는 한국에 돌아가 경제적 안정을 찾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씨는 “차라리 나와 무빈(장남)이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당신은 여기서 남자답게 도전을 계속하라” 며 남편의 기를 북돋워줬다.


2009년 추신수가 원정경기를 떠났을 때 하씨는 병원에 가서 둘째 아들 건우를 낳고 24시간 만에 혼자 퇴원했다. 추신수는 학창 시절부터 야구팀 주장을 도맡아 했던 남자다. 10년 가까이 눈물 젖은 햄버거를 씹은 끝에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독종이다. 그런 추신수도 아내의 강인함에 매번 놀란다고 한다. FA 계약을 앞두고 추신수가 “조금만 더 고생하자. 편하게 해주겠다”고 하자 하씨는 “뭘 바라고 고생하는 거 아니다”고 답했다. 아내는 남편의 어제와 오늘, 시작과 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내를 존경한다는 추신수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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