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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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18일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 말을 두 번 했다.

오후 2시 서울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들어가면서, 그리고 오후 11시30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 직전이다.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의 첫 마디다. 심경을 묻는 기자들에게 던진 말이다.

김대중 정권 내내 '소(小)통령''대(代)통령'이라는 별칭을 들으며 국정을 장악했던 스스로의 처지를 읊은 말일까, 아니면 햇볕정책이 궁지에 몰린 金전대통령을 의미한 것일까. 어쨌거나 권력무상의 소회를 담은 셈이다.

구치소 호송 전 그는 포토라인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예비접촉 때 특사 역할을 한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그 문제에 있어 책임질 일이 있으면 사법부에서 판단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어 "억울한 점은 없다. 앞서 아무 책임도 없는 두 분(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구속됐는데 내가 구속이 안되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백50억원과 관련된 부분은 현재 특검에서 계좌 추적을 통해 자금 흐름을 쫓고 있으니 사실대로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朴씨는 또 "꽃잎이 진다고 해서 바람을 탓하지 않겠다. 다만 한잎 차에 띄워 마시면서 살겠다"고 말한 뒤 조정래씨의 10권짜리 대하소설 '한강'의 7~9권을 소지한 채 구치소로 향했다.

배웅한 측근들에게 朴씨는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하겠다. Soul searching(영혼을 찾는) 시간으로 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朴씨는 이날 영장실질심사 최후 진술을 통해 햇볕정책의 의미와 성과를 강조하기도 했다.

"정상회담이 없었으면 지금도 한반도는 전쟁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외국 기업들의 투자 유치로 외환 위기를 극복한 것도, 성공적인 월드컵도, 부산 아시안게임의 북측 참석도 모두 정상회담의 결과가 아니겠느냐" 이어 "북한은 적성국가이지만 동시에 형제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 "실질심사를 신청한 것은 구속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상회담의 소회를 밝히고 1백50억원 수수 의혹을 풀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朴씨는 출두 며칠 전 金전대통령이 동교동 자택으로 식사를 하러 오라고 청했으나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측근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金전대통령에게 부담이 될까봐서"였다고 전했다.

한편 그는 영장실질심사에서 "현대가 북한에 5억달러를 보내기로 한 사실을 언제 알았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남북 정상회담을 한달 앞둔 2000년 5월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이 金대통령에게 '현대가 경협 대가로 5억달러를 주기로 약정했다'고 보고했었다"고 밝혔다.

지난 16일 특검팀에 출두하면서 제출한 소명서의 '대북 송금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해 9월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관련 의혹을 제기했을 때'라는 내용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이수기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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