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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들의 워킹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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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수련 기자 중앙일보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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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
경제부문 기자

얼마 전 아이 방학 숙제 때문에 한바탕 집안이 시끄러웠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 개학 날 아침, 과제물로 나온 책이 새 책인 양 깨끗한 채 발견된 게 발단이었다. 3주가 넘는 방학 동안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채 가방에 처박혀 있었다. 아이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붓고 출근길에 나섰다.

 다음 날 벼락치기로 숙제를 끝내고 제출하긴 했지만 개운치 않았다. 시어머니는 ‘내가 잘 못 챙긴 탓인가’ 싶어 마음고생, 나는 나대로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내버려둔 내 잘못’이란 생각에 머리가 무거웠다. 숙제 한 번 안 한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어 넘기려다가, ‘이런 식이니까 엄마가 일하는 집 애들이 방치아동이란 소리 듣는 거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에 금세 우울해졌다. ‘아이를 믿어줘라. 믿는 만큼 아이가 큰다’는 품격 있는 조언들도 별 도움이 안 됐다. 그러다가 문득, 20여 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서는 엄마는 이런저런 당부들을 쏟아냈다. 목에 집 열쇠 걸고 다니지 않기, 아무에게나 대문 열어주지 않기, 동생들 잘 챙기기, 숙제 잘해놓기…. 워킹맘이었던 친정엄마는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믿고 맡겼다. 하지만 종일 집을 비우는 부모의 불안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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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엄마도 알고 나도 알았다. 모두 각자 몫을 잘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도우미 아주머니들의 손을 빌리며 우리의 일상은 굴러갔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엄마는 항상 누군가에게 미안해했고,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워킹맘이 ‘죄인처럼’ 살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일과 가정의 균형을 얘기하는 사람을 대놓고 욕하기 힘든 분위기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20, 30년 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자녀 교육이든 생활 습관이든, 뭔가 이상 신호가 보이면 화살이 엄마에게 먼저 날아온다. 일도 가정도 모두 잘해내고 싶은 워킹맘들의 몸과 마음은 산산이 부서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워킹맘의 육아·교육 성공기를 다룬 책에 워킹맘들이 몰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달갑지가 않다. 그 ‘성공 비법’이 내심 궁금하면서도 손이 가지는 않는다. ‘어찌 됐든 양육은 결국 엄마 책임’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오히려 요즘 내게 힘이 되는 건, 그런 비법이 아니라 워킹맘의 딸로 살아본 내 경험이다. 혼자서 결정해야 할 기회가 많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남들보다 일찍 얻을 수 있었다. 이건 워킹맘의 아이로 자라 언젠가는 워킹맘의 남편이 될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박수련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