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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사는 아이들에게 온 e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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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종권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종권
사회부문 기자

‘일본, 불법체류자 처벌 강화’.

 1999년 말 국내 신문 사회면에 나왔던 기사 제목이다. 불법체류자가 적발되면 그냥 추방하지 않고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 뉴스가 국내에서 이목을 끌었다. 당시 일본에 있던 한국인 불법체류자가 약 6만4000명(현재는 약 1만3000명)이었다. 외환위기 여파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먹고살아 보려고 일본에 갔던 이들이다. 한국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이들과 자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속속들이 보여 주는 기록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충분히 짐작은 간다.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기조차 힘겨웠을 것이다.

 이런 짐작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일이 지금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그 현실을 생생히 들여다봤다.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전한 ‘숨어 사는 아이들 2만 명’ 시리즈(본지 9월 10, 11일자 1, 4, 5면)를 취재하면서였다.

 국민건강보험에 들 수 없고 보육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그들에게 병원이나 어린이집은 언감생심이었다. 행여 단속에 걸릴까 봐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좁은 방 안에서 TV를 보며 지내는 아이들이 많았다. 불법체류자 부모를 뒀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도 없이 숨어 자라는 아이들이다. 이들에 대한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많았다. ‘죄 없는 아이들. 하지만 불법은 불법이다. 부모와 함께 추방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 치과 의사는 e메일을 통해 “이가 아파도 치과에 못 간다는 아이를 치료해 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강원도 강릉시약사회 우준기 회장은 “부모 마음은 똑같은 것인데 오죽하겠느냐. 아이들 의료를 지원해 줄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피아노를 전공한 대학원생인데 아이들 놀이 선생님이 돼 주겠다”는 e메일도 있었다. 불법체류 여부를 떠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보듬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불과 15~20년 전 한국은 국내에 들어온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선진국에 간 한국인 불법체류자를 걱정하는 나라였다. 인권을 생각해 달라고 선진국에 부탁하던 나라였다. “다른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은 당신네 나라 경제에도 보탬이 된다”고 하면서다.

 그러던 것이 처지가 바뀌었다. 한국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 잘살아 보겠다고 외국인이 밀려오는 나라가 됐다. 이젠 과거의 경험을 거울 삼아 우리에게 맞는 불법체류자 정책을 세울 때가 아닐까. “불법체류자는 무조건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뿐 아니라 그들을 보듬어 주겠다는 시민들의 마음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최종권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