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통화 불일치를 통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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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국제금융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이 여러 측면에서 이뤄졌다. 신흥개발국가들은 보다 신축적인 환율제도를 도입했고, 금융감독과 기업지배구조를 국제기준에 일치시키고 투명성과 기업공시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등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통화 불일치(currency mismatch)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통화 불일치란 외화로 표시된 부채와 자국통화로 계산된 자산이 다른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달러를 빌려 원화로 교환해 쓰는 기업의 경우 원화 가치가 낮아지면 갑자기 원화를 기준으로 한 부채 규모가 커져 부도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 신흥개발국 금융위기의 척도

통화 불일치는 세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통화 불일치로 인해 금융위기를 맞을 수 있을뿐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뿐 아니라 멕시코.러시아.터키.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신흥개발국의 최근 금융위기가 주로 통화 불일치 문제로 발생했다.

한국의 경우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이 1995년 1백85%에서 97년에 3백30%로 뛰어올랐다. 같은 기간 한국 내 은행들이 해외 은행에서 빌린 돈이 국내 민간 여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에서 46%로 늘어났다.

통화 불일치가 신흥개발국에서 외환.금융위기를 나타내는 주요 지표 중 하나가 된 것은 당연하다. 90년대 들어 통화 불일치와 통화가치 하락의 폭이 커지면서 신흥개발국의 생산이 더 위축되기도 했다.

둘째, 통화 불일치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면 통화정책이 경제위기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워진다. 통화 불일치의 정도가 크지 않다면 금리를 내려 경기를 자극할 수 있다.

하지만 통화 불일치 정도가 상당한 규모에 이르면 디플레이션을 겪으면서도 금리를 내리기 힘들게 된다. 금리하락이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면 기업들의 연쇄부도 사태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통화 불일치 정도가 심해지면 신흥개발국이 변동환율 시스템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평상시라면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금리정책을 동원하고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통화 불일치가 심해지면 통화가치의 하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독립적인 통화정책이나 외부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을 쓸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신흥개발국이 통화 불일치를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일정 범위 내에서 조정할 수 있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하는 방법이 있다. 명목환율의 움직임에서 외환위기의 징조를 파악해 통화 불일치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물가 관리목표를 제시하는 통화정책도 시장에 물가 상승에 대한 지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물가 관리목표를 잘 지켜야만 국내 채권시장이 발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흥개발국의 경우 외화를 벌어들이지 못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외화대출을 보다 엄격하게 해야 한다. 금융감독기관도 은행의 외환 영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 은행 외환영업 규제 강화해야

또 시장에서 규율이 지켜질 수 있도록 국제통화기금(IMF)이 지역별.국가별로 통화 불일치에 대한 데이터를 정기적으로 수집해 발표하고, 통화 불일치가 심해지는 곳에 사전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 IMF는 구제금융 등을 할 때 통화 불일치를 줄이는 조건을 붙이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해외에서 국공채를 많이 발행한 신흥개발국은 해외 국공채의 비중을 줄이는 중기적 목표를 세워야 한다. 물가를 잘 관리하지 못했던 나라라면 해외 채권을 고정금리의 자국화폐 표시 채권으로 바꾸는 중간단계로 물가연동채권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신흥개발국은 정책의 우선순위를 국내 채권시장의 발전, 위험회피 수단의 개발, 외국은행의 진입장벽 해소 등에 둬야 한다. 이런 조치를 통해 통화 불일치를 통제하면 신흥개발국이 지속적인 성장과 금융시장 안정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스 골드 스타인 美 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정리=최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