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하늘로 날고 싶은 제자에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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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시 한 학기가 끝이 났다. 학기 초의 무질서가 좀 정돈될라치면 어느새 중간고사, 겨우 중간고사 성적 제출하면 또 어느새 학기말이다. 늘 그렇지만,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는 이번에는 정말로 충실히 잘 가르쳐야지 마음먹어 보지만, 끝나면 아쉬움이 앞선다.

얼마 전 어느 교수님이 정년퇴임사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하루.한달.1년, 이렇게 흘러가지만, 선생들의 시간은 1학기.2학기, 이렇게 학기별로 흘러간다.

피천득씨 수필에 새 색시가 시집와서 김장 서른번만 담그면 할머니가 된다고 했듯이, 가르치는 과목의 교안 몇 번 꺼냈다 넣었다 하면 어느새 정년퇴임할 때가 된다고. 가르치는 일은 절대로 단지 학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니까 덕을 많이 쌓으라는 부탁 말씀이었다.

이번 학기에 내 영문학개론 수업에는 정말 꼭 용훈이를 닮은 학생이 있었다. 내가 유학에서 갓 돌아와 햇병아리 강사시절에 내 영작수업을 수강하던 용훈이는 좀 독특한 학생이었다.

우선 좀 눈에 띌 정도로 키가 작았고, 수업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하거나 아예 팔베개를 하고 엎드려 잤다. 숙제를 주면 너무 성의없이 했고, 그나마 아예 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새내기 선생으로 열정에 가득차 있던 나는 용훈이를 많이 꾸짖곤 했다. 용훈이는 늘 혼자였고, 수업이 없을 때는 인문관 앞에서 지나는 사람들도 아랑곳없이 '호잇, 호잇' 하면서 무슨 중국무술 비슷한 것을 연습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용훈이는 내 연구실 문 밑에 매일 쪽지를 넣기 시작했다. 언제나 "선생님 저는 하루에 키가 2㎝씩 크고 있습니다. 머리가 마치 솜으로 꽉찬 듯 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공부하기 싫으니까 말도 안 되는 핑계만 댄다고 꾸중하고, 이후 계속 들어오는 쪽지도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에 결석한 용훈이는 다시 쪽지를 남겼다. 이번에는 좀 다른 내용이었다. "엠마오관에서 하늘로 날아가겠어요."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 조교들과 함께 서둘러 엠마오관으로 갔다.

아닌 게 아니라 용훈이는 엠마오관 옥상의 난간에 앉아 있었다. 순순히 조교들을 따라 내려온 용훈이는 말했다.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싶어요. 자유롭고 싶어요. 선생님, 절 하늘에 데려다 주세요."

결국 용훈이는 휴학을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용훈이 아버지는 남미 어느 나라의 대사였고, 어렸을 때부터 모든 일에 형보다 탁월하고 키 크고 잘 생긴 용훈이 동생만 편애하고, 용훈이는 못생기고 공부 못한다고 심하게 구박했다고 했다.

아마 용훈이는 자기도 동생처럼 키가 크고 싶어서, 그 바람이 너무 커서 실제 키가 크고 있다고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부모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너무 외로워 쌀쌀맞은 선생에게라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용훈이가 떠나고 난 후 나는 제발 좀 도와달라고 안타깝게 손 내밀던 용훈이를 알아보지 못한 나를 많이 자책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말보다 마음을 들어주는 선생이 되리라 다짐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고, 아마 이번 학기에도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소망을 가진 학생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학식만을 전하는 선생이 되어 학기별로 흘러가는 내 인생만 탓하며 그저 타성처럼 강단을 지키고 있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