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주방장들 '사스 피해자 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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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홍콩 주방장들의 이웃사랑이 뜨겁다.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잠잠해지자 각양각색의 바겐세일과 자선기금 모금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중 28개 유명 식당이 참가하는 '홍콩 요리사 경연대회'는 단연 압권이다.

참가 요리사팀은 1인 기준으로 보통석 6백홍콩달러(약 8만원), 귀빈석 1천홍콩달러 가격으로 30여개 나라의 다양한 요리를 제공한다. 식당 주인은 요리 재료를 공짜로 내놓았으며 수익금은 사스 피해자들에게 전달된다. 음식점 주인과 요리사들 스스로가 사스로 인해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이라는 점도 감동을 더해준다.

사스가 기세를 떨쳤던 지난 4~5월에 수백 곳의 음식점이 문을 닫았고, 요리사들은 감봉.감원에 휘청거렸다. 평소 예약조차 힘들었던 최고급 식당들도 테이블이 텅텅 비다시피 하는 불황을 겪었다. 5성급 호텔의 뷔페 식당은 일시 휴업을 선언했다.

주방장들과 사스의 악연은 그 뿐 아니다. 사스에 처음 걸린 환자도 야생동물 요리사라고 한다. 중국의 선전(深)에서 요리사 황싱추(黃杏初.36)가 뱀.닭.사향 고양이를 푹 고아 만드는 '용호봉황탕(龍虎鳳皇湯)'을 요리하다 재료에 있던 사스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다 보니 사스 한파는 음식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불황이면 가격 할인과 세트 메뉴로 손님을 붙잡고, 매년 열리는 '음식 박람회'엔 주방장들이 '음식 천국'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일주일씩 박람회장을 지키는 것도 집착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홍콩의 식당가는 '음식천국'의 명성을 지키기보다 '사스 예방 메뉴'를 개발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물가가 비싼 홍콩에서 17홍콩달러(2천5백원)의 음식이 등장한 것은 그 결실이다.

요리사에겐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식도락을 헐어내더라도 손님들의 건강을 살펴야 한다는 정신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자선행사를 보면서 홍콩 요리의 숨은 경쟁력은 요리사의 손끝에 배어 있는 이웃사랑 정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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