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서먹해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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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계가 다시 서먹해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노무현(盧武鉉)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고 '튼튼한 상호 신뢰 구축'을 언급한지 채 한달이 안돼서다.갈등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외교적으로는 상대국에 대해 서운해할 만한 상황이 자꾸 발생하고 있다.

우선 황장엽(黃長燁)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미국 방문을 둘러싸고 한미 양국이 미묘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양상이다.

미 국무부는 지난달 29일 "황씨가 미국에 오면 그의 지위에 걸맞는 신변보장을 하겠다"고 한국 특파원단에 공식 확인했다.한국 정부가 황씨의 신변 안전을 이유로 방미를 거부할 것이라는 국내 언론 보도가 나온 직후다.국무부 관계자는 12일에도 "황씨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거듭 밝혔다.황씨의 방미를 간접적으로 촉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국 정부도 처음에는 황씨가 미국에서 북한 실태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입장이었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은 "노대통령의 방미에 앞서 미국을 방문한 나종일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이 긍정적 반응을 보여 황씨의 방미가 이뤄지는 것으로 알았다"고 말했다.또 국정원도 노대통령의 방미를 전후해서는 "황씨가 원하면 보낸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황씨를 초청한 수잔 쇼티 디펜스 포럼 이사장은 지난달 말 황씨의 방미 불허 보도가 나간 뒤에도 "한국 정부가 이번에는 황씨의 방미를 허용할 것"이라면서 낙관론을 폈었다.

워싱턴의 한국 전문가는 "노무현 정부는 황씨가 미국에서 북한을 비난할 경우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이번에도 황씨의 방미가 좌절되면 부시 정부가 노무현 정부를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부시 행정부내에서 황씨의 방미 문제를 노무현 정부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한국 정부로서는 부담이다.

이와함께 12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회담에 한국이 불참한 것도 한미공조의 짐이다.대북 봉쇄 논의의 직접 당사자격인 한국이 빠진 것이기 때문이다.또 이번 회의에서 논의된 결과를 미국이 한국에 통보할 경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한미간에는 또다른 긴장관계가 조성될 가능성도 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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