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광복절 특사 유감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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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지난주 칼럼을 보고 이렇게 묻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그래서 범칙금 안 낸 건 어찌 됐나요?” 못 본 독자를 위해 요약하면, 프랑스에서 근무할 때 신호위반으로 범칙금 딱지를 뗐는데, 대통령선거 특사(特赦)를 기대하고 안 냈다가 교통법규 위반 사범은 제외되는 바람에 낭패를 봤다는 얘기였다.

 이의 신청을 했던 건 사실 사면 말고도 또 하나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파원 임기가 일 년도 채 안 남았던 거다. 프랑스 사람들 일하는 걸로 봐서 그 안에 법정 출석요구서가 나올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귀국했는데 한국까지 날아올 리도 없었다. 설령 그전에 나온다 해도 프랑스 법정을 취재할 기회가 생기는 거니 나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귀국 달포쯤 전에 떡 하니 출석요구서가 날아왔다. 우리로 따지자면 즉심 같은 거였는데 법정에 가보니 나 같은 사람이 50명 정도 앉아 있었다. 나름 의기양양했던 나는 그들을 보고 기가 죽고 말았다. 많은 사람이 무죄를 입증하려고 엄청난 양의 증거 자료를 준비해 왔던 것이다. 옆자리 남자는 거의 전화번호부 두께의 서류와 사진들을 들고 있었다. 나보다 프랑스어를 훨씬 잘하는 현지인들도 그럴진대 외국인이 입 하나로 다퉈보겠다고 만용을 부렸던 거다.

 어쨌거나 변호사들과 법복을 입은 판검사가 들어오고 재판이 시작됐다.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은 모두 여자였다. 뒤를 돌아보니 나와 같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남자였다. 남자들이여 각성하라! 우선 변호사들이 수임 사건을 처리하고 퇴장한 뒤 검사가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중언부언 계속된 얘긴즉슨 이랬다. “이건 정식 재판이 아니다. 지금 100유로도 안 되는 범칙금에 불복하는데 정식 재판에 가면 그게 1000유로가 될 수도 있고 면허정지도 추가될 수 있다. 알아서 판단하라.”

 첫 번째 호명된 사람은 우연히도 내 옆의 사내였다. 그는 겁 먹지 않고 용감하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가 증거를 내밀기도 전에 검사의 구형이 떨어졌다. “범칙금 600유로, 면허정지 2개월!” 판사 역시 똑같은 선고를 했다. “이의 있으면 정식 재판을 청구하세요. 다음~.” 이른바 시범케이스였다. 장내에 긴 탄식이 사라진 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검사는 당초의 범칙금을 그대로 구형했고 사람들은 “이의 없습니다” 돌림노래를 불렀다. 나도 따라 불렀다.

 옛날 얘기가 장황하게 흘렀어도 이해하시라.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를 위해서였다. 한 청년이 호명되자 일어서서 말했다.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저는 학생인데 범칙금을 낼 돈이 없습니다.” 그때 놀랄 일이 벌어졌다. 청년의 말에 추상같던 검사가 갑자기 자상한 엄마 모드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저런, 그럼 15유로로 해주면 낼 수 있겠니?” 같은 60유로의 범칙금이 600유로도 되고 15유로도 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학생의 범칙금만 깎인 데 억울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옆자리 사내에겐 물어보지 못했다).

 이런 걸 배워볼 순 없을까. 학생들한테만 혜택을 주자는 게 아니라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골라 은전을 베풀자는 얘기다. 220만 명씩 한꺼번에 행정제재를 감면해주는 방식 말고 말이다. 그중에 억울하고 딱한 사람이 왜 없을까마는 벌써부터 다음 사면을 기다리며 난폭·음주운전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 나는 믿는다. 대규모 사면 이듬해에 교통사고와 음주운전이 급증한다는 경찰청 통계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대규모 사면을 하는 건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선심성이라는 걸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일일이 가릴 수 없다고? 그럼 사면을 안 하면 그만이다. 지난주에도 썼듯,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은 잘못의 대가를 응당히 치러야 하는 것으로 믿고 산다. 어려워도 치른다. 최태원 SK 회장도 일반인들처럼 형기의 70% 이상을 마치고 형집행정지로 출소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여전히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