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직업도, 출근시간도 모두 알고 있었다"

미주중앙

입력

몸값 내고 무사히 풀려났지만
추가 요구로 가족까지 위험

주변 사람 못 믿게 된 지금
20년 일군 터전 떠날까 고민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24일 오전 8시30분 운전기사, 직원과 함께 차에 타서 집을 나섰다.

15분쯤 갔을까. 언제부턴 지 따라오던 뒤차가 갑자기 우리 차 옆으로 붙었다.

"연방 경찰이다. 길가에 차를 세워라!"

경찰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도망가라고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운전사가 차를 세웠다. 상대 차에서 2명이 내리더니 우리에게 권총을 겨눴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곤 나를 자기들 차에 태워 출발했다. 뒤에선 또 다른 공범들의 차가 뒤따라왔다.

차 속에서 그들은 내게 수갑을 채웠고,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할 작정인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멈췄다. 외진 동네의 허름한 주택이었다. 안에서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와 5~6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전문 납치 조직이었다.

그들은 내 이름이 '류'이고, 마흔 후반의 원단무역업체 사장이며, 사는 곳이 멕시코 근교의 부촌이라는 것 등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평소 출근 시간과 동선까지 알고 날 노린 '계획된 범행'이었다.

최근 멕시코시티 부근에서 한국인들의 납치는 흔했다. 올해 들어서만 4명이 납치돼 거액의 몸값을 주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몸값으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앞이 깜깜했다. 멕시코에 자리 잡은 지 20여 년, 수년 전 시작한 내 사업이 잘 풀리면서 그동안의 고된 이민 생활에 보상을 받는 듯했던 차였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간절했다.

납치된 지 이틀째인 일요일 새벽 5시30분. 그들은 내게 전화기를 건넸다. 가족과 통화하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 울고 있는 아내를 달랬다. 돈을 마련해야 했다. 아내는 협상 전문가들과 경찰이 돕고 있다고 했다. 또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에도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다. 기다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잡혀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더 커졌다. 그들이 음식과 물을 주긴 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내 생명이 그들이 거래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생각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또 사흘이 지났다. 28일 자정쯤, 그들은 "돈을 받았다. 풀어주겠다"면서 나를 차에 태웠다. 2시간쯤 지났을까. 도로변에 날 내려주고 돈을 줬다. "택시타고 집에 가라"는 말만 남기고 그들은 사라졌다.

29일 새벽 2시, 집에 왔다. 납치된 지 닷새째, 110시간 만이었다.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안전하지 않다. 그들은 내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또, 추가 요구까지 해왔다. 아내와 아이들마저 위험해졌다.

경찰이 날 보호해준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체포될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올해 들어 발생한 4건의 한국인 납치 사건 중 범인이 잡힌 사례는 없다. 경찰도 한패가 아닐까.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정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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