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코드 과잉의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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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코드를 잘 읽어서 정권을 잡았고, 코드에 맞는 사람들로 진용을 짰는데, 왜 코드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질까.

첫째 코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감성 코드, 둘째 코드는 무경험자들의 어설픈 이념 코드, 셋째 코드는 시대가 요구하는 현실 코드이기 때문이다.

계속 코드 코드 하는데, 답답한 것은 '자기네' 코드가 '시대'의 코드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시대의 코드에 자기네를 맞춰야지, 자기네 코드에 시대가 따라주겠는가.

'대~한민국'이 '떼~한민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걱정부터가 그런 코드 불일치의 단적인 사례다. 코드에 맞을 줄 알고 뽑았지만, 반대로 코드가 통할 줄 알고 호소했지만 서로가 그게 영 아니더란 말씀이다.

사실은 그게 코드 불일치가 아니라 '선거와 통치는 다르다'는 엄연한 사실을 서로가 부딪쳐 가며 깨달아 가는 과정일 뿐이다. 룰라 대통령의 브라질은 이를 빨리 배웠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큰 수업료를 내면서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런 건 피차 빨리 깨달을수록 좋다.

애초부터 잘못 잡은 코드도 있다. '분배'가 그렇다.

8년째 국민소득 1만달러를 맴돌고 있는 나라에서 분배를 위한 용빼는 재주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었다. 거기다 성장이 자꾸 가라앉으니 각종 통계가 말해주듯 분배는 더 악화되고 있다. 저성장의 가장 확실한 피해자는 저소득층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분배정책은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가장 확실한 분배정책은 교육비와 주거비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다. 그런 데에 코드를 맞춰야 했다. 그런데 이 정부는 국정의 우선 순위를 경제에 두지 않고 있다.

대신 '힘의 균형'이란 코드를 잡았다. 그러니 노사관계가 불안하고 경제 부총리나 장관들이 힘을 못 쓰는 것이다. 요즘처럼 경제팀이 힘들어하는 때는 별로 없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코드는 지금 성장이고 경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는 더욱 더 그렇다.

요즘 정부는 시중에 풀려 있는 돈이 제발 부동산에서 증시로 가 주었으면 하고 있다. 정부의 그런 간절한 바람도 코드를 고쳐 잡지 않는 한 이뤄지지 않을 일이다.

빨리 고쳐 잡은 코드도 있다.

이번 일본 방문을 통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코드에 빠르게 자신을 맞춰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미국과 일본 방문 후 무엇을 얻어냈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盧대통령이 방미.방일 이후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돌아서서 말을 바꾸는 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盧대통령의 방미.방일 외교를 놓고 굴욕이니 배신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국제사회의 코드를 잘못 읽어서다. 오히려 돋보인 것은 盧대통령의 빠른 학습효과다. 부산에서 어느 날 재야 인권변호사로 변신하며 386세대의 코드를 빠르게 학습했던 盧대통령이다.

그러나 당시의 코드와 통치자로서의 코드가 같을 수는 없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盧대통령의 빠른 학습효과다.

여전히 다들 코드 코드 하는데, 제일 중요한 코드는 시대의 코드다. 시대가 요구하는 현실 코드부터 읽고 나서 자기의 코드를 찾아야 한다. 나라 밖의 코드까지 읽어야 한다. 코드 과잉의 시절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코드가 시대의 코드라고 착각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