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view &] 정책 트라우마부터 걷어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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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표재용
산업부장

수상 레저 시즌이 돌아왔지만 서울 한강의 요트 선착장은 생각보다 한산하다. 녹조의 늪 같은 선착장에 대다수 요트들이 묶여있고 이 중 몇 척은 매물 딱지가 붙은 채 새 주인을 찾고 있다. 그나마 휴일이나 주말엔 요트들이 물살을 가르긴하지만 요트 산업을 키워 연중 내내 주변 상권과 지역 관광을 덩달아 띄우겠다는 서비스발 ‘한강의 기적’은 여전히 희망사항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돈 있는 사람들이 요트를 사거나 즐기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위화감 조성으로 욕을 먹지는 않을까 하는 ‘초고도 눈치 사회’ 탓도 있다. 그러나 이들을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건 요트를 띄우면 행여 세무조사라도 맞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대한민국 고소득층들은 수입차를 사자마자 곤욕을 치렀던 불과 십수 년 전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수출 기업의 숨통을 죄는 원화 강세 해법으로 정부가 내놓은 해외 투자 활성화 대책 역시 엇비슷한 그늘이 어른거린다.

 정부는 해외펀드는 물론 부동산 투자, 기업 인수합병(M&A)에 나서는 경제주체들을 위해 번거로운 신고제를 개선하고 면세 혜택을 주는 것 등을 골자로 한 해외투자 가이드라인도 내놨다. 더불어 외환거래 관련 규제도 완화했다. 가계와 기업에 잠겨 있는 여윳돈을 나라밖으로 내보내 어떡하든 위험수위로 치달은 원화 강세 기조를 돌려보려는 고민이 담겨있다. 실제로 국내엔 달러가 넘친다.

 당장 38개월 연속 수지 흑자로 올해 4월까지 경상수지 누적 흑자만 316억 달러다. 넘치는 달러로 인해 달러화 대비 원화 절상률이 주요 32개국 통화 중 세 번째로 높다. 수출 기업은 원고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해외투자는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GDP 대비 해외직접투자 비중은 17.9%로 불과하다. 선진국(47.1%)은 물론 개도국 평균(18.7%)에도 못미친다. 상황이 이런 만큼 해외투자 확대는 그나마 실현 가능하고 효과가 기대되는 환율 비책이 될수 있다. 정부가 환율에 개입하거나 혹은 기축통화를 가진 미국·일본처럼 맘껏 돈을 찍어내는 방법을 동원하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정작 기업들은 시쿤둥하거나 눈치만 보고 있다. 기업들에겐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바로 지난 정권에서 국가 대계사업으로 밀어부친 해외자원개발 사업의 말로가 어떤지를 뼈저리게 체감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강권으로 해외 자원개발에 뛰어든 회사들이 국영·민간 가릴 것 없이 줄줄이 관련자가 검찰에 소환되거나 회사가 풍비박산이 나고 있다. 이런 모습을 기업인들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올 초 해외 신사업 개척을 위해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 실리콘밸리에 펀드를 조성한 한 대기업 총수는 해외투자 이야기만 나오면 진저리를 친다. 해외투자 신고를 끝내기 무섭게 그룹 주요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은 것이다. 이렇듯 정부 부처간 손발이 안맞거나 ,혹은 다른 생각을 가진 부처가 몽니를 부리면 기업들이 꿈쩍도 하지않는 상황이 연출되기 마련이다.

 해외투자 활성화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 부처를 망라해 보다 정교한 후속 지원책이 시급한 이유다. 그럴듯해 보이는 정책을 툭 던지는데서 그치지 말고 지속 가능할 수 있는 서비스가 이뤄지는 게 핵심이다. 우선 한국투자공사(KIC)가 먼저 나서 모범 사례를 보여줘야 한다. 민간에만 등떠미는 듯한 의혹도 지우고 이번 대책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해외투자와 관련된 일체의 우려나 궁금증이 생기지 않도록 별도의 응대 조직을 가동해야 한다. 해외투자 가이드라인 설명회도 ‘더 이상 필요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열어야 함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정부 부처간 딴 이야기가 안나오도록 통일된 보조를 취하겠다는 제스처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안전 장치들이 마련되야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데자뷔 현상으로 온 나라가 요동치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 말만 믿고 행동에 나섰다가 불과 몇 년 뒤에 일자리와 돈을 해외로 빼돌린 매국노 기업이란 멍에를 쓰고 검찰에 소환되거나 국회 청문회장에 끌려 나가는 기업인들을 보는 것 말이다.

표재용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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