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아니다” 말 바꾼 일본 … “국가 양심 문제”라는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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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성
정치국제부문 기자

일요일인 지난 5일 외교부는 들뜬 분위기였다. 오후 5시 기자실을 찾은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싼 한·일 정부 간 협상 결과를 1시간여 설명했다. 그는 “협상 과정이 얼마나 지난(至難)했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라며 “강제노역을 공식 인정한 만큼 성공적인 협상이었다”고 말했다. 오후 10시30분 윤병세 장관이 직접 언론 브리핑에 나섰다. 윤 장관의 목소리엔 힘이 실렸다. “우리의 정당한 우려가 충실하게 반영됐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6일 오전 한·일 협상 결과가 언론을 통해 전달되자 여론의 반응은 달랐다. ‘등재 신청 못 막은 등신외교’(kps3****, 네이버), ‘약아 빠진 일본인이, 약속한 대로 이행한다는 보장이 어딨냐’(Anna Lindberg, 중앙일보) 등의 비판 댓글이 즐비했다. 일본이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할 거냐는 우려가 대부분이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은 6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재된 보도자료에도 산업시설의 연도가 1850~1910년으로 돼 있으며, 강제노동을 뜻하는 단어는 없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측이 한 발언이 ‘청구권 협정으로 한·일 관계의 각종 소송이 정리됐다’는 기존 원칙과 변함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국제회의에서 스스로 ‘자신의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강제노동(forced to work)’ 같은 발언을 하고도 말을 바꾼 것이다.

 하루 만에 분위기가 바뀌자 외교부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이날 오후 외교부 관계자는 “일본의 기자회견 내용까지 우리 정부가 일일이 코멘트할 것은 없을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정면 대응하기엔 정부 간 공방전으로 번질까 우려스럽고, 대응을 안 하기에도 개운치 않은 상황이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도 “우리는 영문 해석을 중요시하고, 거기에 따라 풀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오전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 회의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신경민 의원은 “일본의 도발 내지는 무력화 전략이 있을 게 너무나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샴페인 터뜨리고 자축할 때인지 걱정”이라고 꼬집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외교부도 협상에서 일본 측의 말바꾸기를 우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자행된 강제노동을 뜻하는 영문 ‘enforced labor’를 명시하려 일본 측과 승강이를 했다고 한다.

 후유증을 낳은 이번 외교전은 결국 ‘반쪽 승리’가 됐다. 일본 정부는 2017년 12월까지 세계유산위원회에 강제징용 사실 명시와 관련한 이행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문제는 발표 하루 만에 발언을 뒤집은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사실을 제대로 반영할지다. 외교부 당국자는 5일 기자들과 만나 “국가의 양심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양심에 기대기에 앞서 협상에서 더 꼼꼼하고, 더 치열하게 ‘양심’을 명문화할 순 없었는지 많이 답답하다.

안효성 정치국제부문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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