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라스 “긴축안 수용” 사실상 굴복 … 메르켈 “국민투표 전 협상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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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달라” 아우성 … 공짜 복지의 재앙 1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의 한 은행에서 연금 수급자들이 번호표를 먼저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이날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카드가 없는 연금 수급자들을 위해 은행 지점 1000여 곳을 다시 열게 했다. 그리스 사태는 감당할 능력이 없는데도 공짜 복지를 남발한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불러왔다. [아테네 AP=뉴시스]

“부가가치세제에 대한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1일 오전(현지시간) 공개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의 2쪽짜리 서한 중 일부 내용이다. 서한은 전날 밤 보낸 것으로 수신인이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다. 흔히 그리스의 채권단 트로이카로 불리는 기구의 수장들이다.

 이 서한을 입수·보도한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치프라스 총리가 (트로이카가 요구한) 거의 모든 구제금융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평가했다. 실제 그랬다. 다만 섬 안에서 부가세를 낮추는 것과 2019년 12월까지 연금생활자에 대한 지원금을 점차 폐지하겠지만 그 속도를 완만히 하겠다는 것 정도만 고수했다. 외신들은 “사실상 치프라스 총리가 며칠 전엔 거부하던 조건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채권단에 굴복했다”고 평가했다.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은 이날 오후 이 같은 내용을 논의했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날 연방의회 연설에서 “5일로 예정된 그리스 국민투표 이전에 어떤 구제금융 협상도 없다”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타협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고 했다. 반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즉각 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이후 TV 연설에서 “국민투표를 제안한 뒤 협상 조건이 더 나아졌다. 국민투표는 (독일 이 주장하듯)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느냐 여부에 대한 게 아니다”며 협상용이란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어 “국민투표를 예정대로 실시하겠다”며 “정부는 (국민투표 안건인 트로이카가 제시한 긴축안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사태가 국민투표 찬반 결론이 날 때까지 별다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사실 그리스로선 치욕적인 1일이었다. 이날 오전 1시엔 서방 선진국 중 처음으로 IMF 채무(15억 유로)를 제때 갚지 못했다. 1945년 IMF가 창립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역대 미납국들은 아프가니스탄·짐바브웨 등 개발도상국이거나 그보다 어려운 국가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구제금융이 종료됐다. EFSF의 분할 지원금 18억 유로(약 2조2000억원)는 물론이고 그리스 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한 109억 유로(약 13조5000억원)가 없던 얘기가 됐다. 영국의 가디언은 “ 그리스는 재정적 생명선마저 끊겼다. 부도 직전이 됐다”고 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막판에 유럽안정화기구(ESM)에 2년간 국가 채무 상환용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3차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기존 구제금융을 단기간 연장해 달라고 제안했다. 현지 언론들은 “그리스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자신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5일로 예정된 긴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취소할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유로그룹은 그러나 고개를 모로 저었다.

 디폴트 첫날인 1일에도 그리스에서의 일상생활은 이어졌다. 다만 은행 창구 앞은 혼란스러웠다. 이날부터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카드가 없는 연금수급자를 대상으로 시중은행 지점에서 주당 120유로(약 15만원)를 인출할 수 있게 허용했는데 새벽부터 수급자들이 몰렸다. 일부 노인은 ‘알파벳순으로 나눠 지급한다’는 은행 측의 설명에 직원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연금수급자인 키콜라오스 아고나토스(62)는 “지병으로 약을 사야 하는데 연금을 받지 못해 약을 살 수 없다”며 분노를 표했다. 아테네 변호사협회는 5일로 예정된 국민투표에 대해 ‘위헌’이란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아테네에서는 채권단 요구 수용에 대한 찬반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국회 앞 신타그마광장엔 EU와 유로존 잔류를 원하는 시민 2만여 명(당국 추산)이 몰렸다. 번개가 치 는 날씨에도 광장을 가득 메웠다. 전날 채권단의 수정안을 반대하는 집회에 육박하거나 능가하는 규모였다. 이들은 그리스 국기와 EU 깃발을 함께 흔들었다. 가슴엔 국민투표에서 긴축안에 찬성한다는 의미의 ‘NAI(네·예스)’란 스티커를 붙였다. 25세의 딸과 함께 광장을 찾은 마키나 굴라진두(57·의사)는 “ EU를 떠난다면 재앙이 될 것이다. 난 유럽 시민으로 남 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타그마광장 반대편과 북부 테살로니키 거리에는 시민 1만7000여 명이 반대 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협상을 반대한다’는 팻말과 함께 긴축정책을 주도한 독일을 겨냥해 독일어로 반대를 의미하는 ‘나인(NEIN)’ 스티커를 붙였다.

아테네=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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