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삶이 가져온 변화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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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 32면

저자: 편석환 출판사: 가디언 가격: 1만2000원

“목이 아프다. 성대종양이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지…….”

『나는 오늘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저자가 처음부터 거창한 뜻을 품고 묵언 수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목이 아프니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고, 교단에 서니 학생들은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했다. 그래서 찾은 병원에선 최대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치료법이란다.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교수에게 말을 하지 말라니. 그건 사형 선고와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서 저자는 방학을 맞아 43일 동안 입을 닫고 말을 하는 대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비슷한 판정을 받은 적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입을 벌릴 때마다 턱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무서워서 치과와 정형외과를 차례로 찾았건만 의사는 태평하게 물었다. “혹시 말을 많이 하는 일을 하시나요?”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단코 말을 적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당시 일개 수험생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턱이 아파올 때면 말을 줄여야지 하고 마음먹었지만 효력은 그때 뿐이었다. 취업 시장의 전선에서 나라는 상품을 열심히 팔아야 할 때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 힘든 결심을 실행에 옮긴 지은이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묵묵히 써 내려간 그의 일기는 담백하다. 하지만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새로운 삶이 열린다”는 고백처럼, 말이 사라진 삶에는 조용한 변화가 일었다. 우선 삶이 단순해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집에서 삼시세끼를 챙겨먹다 보니 끼니가 귀한 줄 알게 됐다. 카드 값도 줄었다. 만남의 횟수와 카드 값은 비례하는 법이니 말이다.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집안일을 시작했고,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 입보다는 손을 바삐 놀리게 됐고 귀가 열리니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소리로 채워져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멋진 것은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다. 처음에는 말을 시킬까 두려워 초인종이 울려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숨죽인채 버텼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과감한 도전을 시작했다. 슈퍼에 가서 라면을 사고 프린터기에 넣을 잉크를 사러 갔다. 가끔은 손짓 발짓을 동원해야 했지만 사람들은 되레 더 친절했다. 말을 하지 못해 쪽지를 건네는 그를 위해 대신 찾아주고 계산해주는 수고를 기꺼이 감행했다.

떠든다는 것이 외로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말도 못하는 놈한테 찾아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를 향해 그는 위로의 말 대신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 큰 어른 둘이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열심히 떠들고 있다면 무서워서일 것이다. 우리는 고요가 무섭고, 외로움이 무서워서 떠든다. 누군가 옆에서 떠들고 있다면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다.” 말로, 글로, SNS로 형태는 달라도 쉴새없이 지저귀는 사람이 우리 곁에도 한 명쯤은 있지 않은가. 그들의 말부터 들어주면 어떨까.

사실 이 책이 대단한 진리를 전하는 것은 아니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내뱉다가 땅을 치며 후회한 적 한 번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대화 중 호시탐탐 내가 말할 기회를 노리다 상대방의 얘기는 귓등으로 들은 적이 부지기수 아니던가.

하지만 “그간 말을 빼먹기만 했지 말을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던가”란 물음에 가슴이 뜨끔하다면 한번쯤 도전해 보자. 24시간이 됐든, 일주일이 됐든 행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기쁨이 있을지니. 좋아진 목과 깊어진 생각은 덤이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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