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47) 장훈 선수 <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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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훈은 일본 내 민족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낸 의지의 사나이였다. 해방 후에도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며 심하게 차별 대우를 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훈은 한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긍심을 지켰다.

나는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일본 출장이 잦았다. 그때마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장훈이 뛰고 있는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경기장을 찾았다. 눈여겨보니 장훈은 타석에서 정신 집중을 위해 다른 타자들보다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타석에 들어서서 천천히 오른발을 고정시키고 잠시 후에 왼발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그 시간이 다른 타자들보다 유난히 길었다.

그렇게 두 발을 고정시키고는 방망이를 천천히 들어 상대 투수를 겨누는 동작을 취했다. 이 동작은 현재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가 취하는 동작과 비슷하다. 장훈의 이런 동작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장훈이 타석에서 이런 동작을 취할 때면 관중석에서 "조선 사람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야유가 나오기 일쑤였다. 장훈은 그런 소리가 들리면 보란듯이 배트를 내리고는 타석을 벗어났다. 그리고 야유가 들려온 곳을 한참동안 노려봤다. 마치 '너 때문에 집중한 정신이 흐트러졌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관중석이 조용해지면 다시 타격 자세를 취했다. 장훈의 이런 카리스마 때문에 관중도 함부로 야유를 보내지 못했다.

이렇듯 한타석, 한타석을 소중하게 여기는 장훈의 집중력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장훈은 골프를 칠 때도 타석에서의 습관처럼 신중하게 자세를 잡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은퇴하고 나서 골프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시작한 다른 선수 출신들과 비슷한 골프 실력을 갖고 있다.

장훈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놓음으로서 편견을 이겨냈다. 장훈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한국인은 절대로 일본인보다 못하지 않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장훈이 네살 때 화상을 입자 그를 등에 업고 이리저리 병원 문을 두드렸지만 일본 병원에서 자신의 한복 차림을 보고 문을 열어주지 않아 장훈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장훈으로서는 화상을 입은 오른손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치솟아올랐을 것이다.

장훈은 후배들이나 주변의 한국 사람들이 차별당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그는 82년 니혼햄에서 투수로 뛰던 주동식이 "일본시리즈 준우승 수당을 일본 선수들보다 적게 받았다"고 하소연하자 바로 다음날 니혼햄의 사장을 찾아가 "한국 사람이라고 차별하는 거냐"고 따져 수당을 더 받아냈다.

장훈은 나니와상고 시절 여러 차례 웅변대회에 나갔을 정도로 말솜씨가 좋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 이런 소질 덕분에 그는 은퇴 이후 방송 해설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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