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진단] 감염 공포가 국민의 ‘원시 뇌’ 놀라게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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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는 대한민국의 풍경을 바꿨다. 쇼핑몰·극장은 한산하고 지하철 이용 승객도 22%가 줄었다. 열이 나자 택시를 타고 응급실을 찾아가 난동을 부린 남성이 있는가 하면, 의료진의 자녀를 찾아 상처 주는 교사도 있었다. 허위 정보는 진위와 무관하게 공유된다. 실제 위험에 비해 과한 반응이고 스스로 합리적 시민이라 여기던 이들의 비합리적 행동이다.

전형적인 공포 반응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920년 심리학자 존 B 왓슨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바탕으로 실험했다. 11개월 된 아기가 흰쥐를 만지려 할 때마다 망치로 쇠막대기를 두드려 울게 만들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일곱 번 반복했다. 그 후 아기는 흰쥐를 볼 때마다 무서워하게 됐다. 이 실험은 부정적 기억과 연관된 학습이 공포증을 만든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때문에 경험이 공포증을 만든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물에 빠진 적이 없어도 물 공포증이 생기고, 좁은 방에 갇힌 적이 없는 폐소공포증 환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반면 감전 경험이 있어도 전기 공포증은 생기지 않는다.

조건반사와 학습이론이 아닌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인류의 생존과 연관한 진화론이 그럴듯한 설명을 한다. 원시인이 숲에서 살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불에 타 죽는 것, 물에 빠져 죽는 것, 뱀·거미에 물리는 것이었다. 다음에 잘 피하면 된다는 학습이론으론 감당 안 되는 치명타였다.

조상들은 배우지 않아도 무서워할 수 있게 유전자에 각인시키기로 했다. 높은 곳이나 연기, 파충류를 처음부터 무서워하고 피하도록 뇌를 설정했다. 그 덕에 인류의 생존 확률은 높아졌다.

이 시스템은 평상시 ‘원시 뇌’라 불리는 곳에 깊숙이 묻혀 있다가 비상 상황에 켜진다. 이를 조정하는 것이 전두엽 같은 고위 중추 기능이다. ‘원시 뇌’가 놀라지 않도록 조절하는 덕에 우리는 불을 켜 음식을 해 먹고,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춰도 공황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다 ‘원시 뇌’가 작동하면 생존에 필요한 비상 행동만 하도록 명령한다. “불필요한 행동이니 하지 말라”고 전두엽에서 명령해도 놀란 ‘원시 뇌’는 말을 듣지 않는다. 시야가 좁아지고, 이성적 행동을 못하고, 온몸이 긴장한다. 공포 증상이다.

감염은 역사가 깊다. 20세기 초 항생제가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의 주요 사망 원인이 감염이었다. 역사적으로 생존과 밀접한 것이 감염이다 보니 메르스에 ‘원시 뇌’가 작동한 것이다. 전두엽은 컨트롤타워 기능을 잃었고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최우선이 됐다.

감염이 만든 집단 공포는 스위치가 켜지면 이성적 설명으로는 가라앉지 않는다. 이럴 때 처벌하겠다고 겁주는 것은 놀란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이성적 판단은 우선권을 잃었다. 전문가의 과학적 설명도 들리지 않는다. 지금은 정부의 신뢰할 만한 행동과 공감적 메시지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성난 ‘원시 뇌’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하지연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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