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형성시기」"BC 1세기 이전으로 올릴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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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10일 춘천 한림대에서 열린 한국고고학 전국대회에선 한국사 최대쟁점의 하나인 삼국의 국가형성시기를 놓고 고고학자와 문헌사학자 사이에 열띤 토론을 별였다. 논의의 대체적인 흐름은 삼국의 형성시기를 기원전 1세기이전, 또는 기존의 학설을 시기적으로 올려잡는방향으로 진행됐다.(본지11월14일자보도).
이날 종래의 학설(3∼4세기설)을 주장한 김정학교수(한국 정신문화연구원)는 당시 논의가미진했던 점을 들어『삼국국가형성은 기원전 1세기로 올릴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해왔다.
『삼국사기』에는 다 아는바와 같이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이 다 기원전1세기에 건국된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사요로서 받아들여질 것이냐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어왔다. 그 이유의 하나는『삼국사기』에 대한 사요비판에 따른 것이며, 다른 하나는인류학·고고학등 연구 자료에 따라 의문으로 생각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연구가 이러한 근대적 역사학방법론에 대한 충분한 섭취가 늦어진데서 아직도 삼국형성의 문제와 같은 중요한 과제가 해결되지 못한채 여러가지 전학문적·독단적이견이 난무하고 있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없다.
지난10일「고고학상으로 본 삼국형성의 문제」심포지엄에서 이기백씨(서강대)는 삼국형성의 시기를『삼국사기』에 있는대로 기원전 1세기로 끌어올려야 될것이라는 주장을 하였고,토론에 참가한 김원룡씨(서울대)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하였다.
필자는 삼국시대의 국가형태에 대한 이해를 쉽게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의 국가기원에서 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국가형태 발전단계를 논하였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국가형성을 농경문화가 시작된 때로부터 보았다. 그리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농경문화가 시작된 연대를 농패인 석도의 형식에 의하여 중국의 앙소문화무기에서 용산문화에 걸친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기원전 2000년 전후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읍락국가가 성립되었다. 만주요령지방에서 형성된 최고의 읍낙국가가「조선」이다. 조선은 본래 민족명인데 그것이 국명으로도 되었다.
다음 단계가 기원 1∼3세기의 초기철기시대로서 읍낙국가의 정복과 통합이 더욱 진전되어 읍낙국가연맹을 이루었다. 이것이 즉『위지』동이전에 기록된 국가형태다. 즉 남쪽에 있어서는 마한·변한·신한의 연맹국가다. 다만 고구려만은 이때에 이미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이러한 여낙국가연맹의 단계에서 마한에 있어서는 맹주국인 백제가 다른 여낙국가를 정복 통합하여 백제왕국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3세기중엽 이후의 일이다. 신한에 있어서는 맹주국이 사로국이 이웃 읍낙국가들을 정복하여 신라왕국을 이루었는데 그 시기가 4세기 이후다. 이것은 고고학적·문헌적 증거자료에 의한 것이다.
알려진대로 이기백씨는 그의 저서『한국사신론』개정판에서 백제주국의 성립을 분명히 3세기 중엽의 고?왕대라고 하였고(동서52∼53면), 신라에 관하여는『사로국이 신라에로 비약하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은 4세기 후엽의 나물마립간때』라고 말하였다(동서56면). 김원용씨도 그의 저서『한국고고학개설』최신판에서 백제의 건국을 4세기초(동서150면), 신라가『실질적인 왕국으로 형성된것을 4세기』라고 하였다(동서165면).
이와같이 이기백·김원용양씨는 다 그들의 저서에서는 백제나 신라의 형성을 분명히 3세기 중엽내지 4세기 후엽으로 보았는데, 심포지엄에서는 삼국형성의 시기를 기원전 1세기로 올려야 된다는 듯이 발언한 것은 국가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온것인 듯 하다. 즉 기원전1세기 운운한것은 읍낙국가연맹(삼한시대)의 시기를 말한 것이다. 이 국가단계는 삼국의국가형태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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