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갯벌은 생명이고 역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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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뉴턴의 운동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어야 한다. 물리학의 법칙이 말하는 것은 그것뿐이지만, 태양계 행성의 궤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규칙성을 지닌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거의 같은 평면 위에서 모두 똑같은 방향으로 공전한다. 게다가 그 공전 궤도는 거의 원에 가깝다. 이는 회전하는 하나의 거대한 가스 덩어리에서 여러 조각이 떨어져 나오면서 태양계의 행성들이 형성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태양계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태양계가 형성될 당시의 상황, 태양계의 역사 때문이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이 말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역사를 통해 실현한다.

흔히 역사라고 하면 기록에 의해 무언가가 남겨져 있는 시대 이후의 인간의 역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물리 법칙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역사가 태양계 안에 숨어 있듯이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우리 주위에 그 흔적을 남긴다.

생명 진화나 지각변동의 과정을 보여주는 화석이나 지층이 우리가 잘 아는 역사의 흔적이지만 사실은 우리 주변의 흙과 물과 공기가 모두 역사의 산물이다.

메탄과 암모니아가 주성분인 다른 행성의 대기와 달리 지구 대기에는 21% 정도의 산소가 포함돼 있다. 지구 대기와 같은 구성비를 가진 행성은 적어도 태양계 안에는 없다. 원시 지구의 대기에도 산소는 없었다. 지구 대기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38억년 생명의 역사가 이뤄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재의 지구 대기는 생명현상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산소 농도를 유지하고 있다. 대기만이 아니라 흙과 물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한 줌의 흙, 한 모금의 물, 한 숨의 공기는 38억년 동안 온 생명이 만들어 놓은 역사의 산물이다.

일본에 원폭이 떨어져 폭풍과 열기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날 살아남은 사람들은 풀과 꽃이 무성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자연의 생명력은 인간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도 그토록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구 생명의 역사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 일이기도 하다. 그 한 포기의 풀과 꽃은 우리에게 구원이고 희망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면의 섬뜩함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수십억년 동안 형성된 생명역사의 흔적이 송두리째 파괴되면서 나타난 지극히 비정상적인 생명체의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우리는 원폭 투하보다 더 집요하게, 더 대규모적으로 지구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파괴하고 있다. 다른 생명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하늘과 땅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 갯벌에까지 이르렀다.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손해일 수 있는데도 마구잡이로 갯벌을 메워야 한다는 데에 이르면 그건 생명의 역사를 파괴하는 맹목적인 폭력이다.

갯벌은 생명이다. 갯벌은 지구의 역사다. 온 생명이 만들어 놓은 38억년 역사의 산물이다. 그 역사를 파괴하는 행위를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됐다. 다른 모든 생명에게 폭력으로가 아니라 동반자로서 다가가는 지혜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다.

오늘 이 땅의 성직자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 네 분께 삼가 경의를 드린다. 그 분들의 서원으로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꽃가슴'이 온 생명과 더불어 생명의 향기를 누리기를 염원한다.

양형진 고려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