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아베, 지금이 방한 절호의 기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2002년 11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중국을 덮쳤다. 이듬해 7월까지 중국은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세계 각국은 주재관·기업은 물론 자국민을 일제히 철수시켰다.

 그때 한국은 어땠나. 김하중 당시 주중대사가 쓴 『하나님의 대사』에 따르면 우리 교민들은 철수하지 않았다. 철수는커녕 ‘사스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성금을 걷어 중국에 전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7월 초 중국을 방문해 사스 발생 후 국가원수로는 처음 중국을 찾은 지도자가 됐다. 참모들이 말렸고 중국 정부도 “안 와도 좋다. 이해한다”고 했지만 노 대통령은 방중을 밀어붙였다. 참여정부 시절 중국과의 밀월이 깊어진 데는 노무현의 이런 용기와 진정성이 있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그해 내내 일본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역시 세계 각국의 탈출 러시가 이어졌다.

 그때 한국은 어땠나. 우리 119구조대는 가장 먼저 일본에 도착했다. 기업들의 지원도 잇따랐다. 삼성·LG·포스코가 인명구조단과 의료진을 파견했고 1억 엔씩의 성금과 구호물품도 전달했다. 국민들도 과거는 덮고 어려울 때는 돕자고 나섰다. ‘쌤통’이라며 비아냥거린 이들이 되레 야단을 맞았다. 국민 성금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무토 마사토시 당시 주한 일본대사는 “한국은 일본의 진정한 친구”라며 감격해했다.

 장면을 바꿔 2015년 6월. 이번엔 한반도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상륙했다. 사스처럼 감염력이 높은 것도 아니다. 방사능처럼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홍콩·대만·중국 등 중화권 네티즌은 한국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메르스 접촉자가 홍콩행 비행기를 탄 것 등을 이유로 “이기적인 한국인” “메르스 수출국”이란 비난이 잇따른다. 일반 시민들은 그럴 수 있다 치자. 홍콩 방역 당국은 의료진 교류를 중단했다. 중국 국무원 측은 ‘한·중 언론인 교류’를 무기한 연기했다. 그것도 하루 전에 “오지 말라. 메르스 때문”이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일본·중국에서 한국을 돕자거나, 의료진을 파견하겠다거나, 성금을 모았다거나 하는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는다. 하기야 일본은 한국이 온정을 베풀던 대지진 당시에도 1만t 넘는 원전수를 이웃인 우리에게 통보도 없이 무단 방류했다. 최근엔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을 금지했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우리나라를 제소했다. 대만·중국은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데도 우리만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받으려고 베푸는 건 온정이 아니다. 한편 괘씸하고 서운하지만 위안도 된다. 한·중·일, 서로 붙어 사는 세 나라 중 그래도 우리가 가장 따뜻한 인류애와 대인의 풍모를 갖췄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니. 그런데도 요즘 메르스 초기 방역 실패와 일부 시민의 일탈로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끼리 그럴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내친김에 엉뚱한 제안 하나를 해본다. 아베 신조 총리의 방한이다. 아베에겐 중화권이 사스 트라우마로 한국에 등 돌린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마침 22일이 한·일 수교 50주년이다. 절차·격식·의제도 필요 없다. 실의와 고통에 빠진 한국민에게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심심한 위로를 위해 찾는 것으로 명분은 족하다. 방미(訪美)를 전격 연기한 박근혜 대통령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메르스 완치 환자와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지난해 4월 네덜란드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아베는 박 대통령에게 먼저 다가가 한국어로 인사했다. 박 대통령은 고개를 확 돌리고 외면했다. 복기해 보면 당시 장면을 통해 아베는 나름 성과를 얻었다. 한·일 관계 냉각의 책임을 박 대통령에게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다수 한국민은 아베가 겉으로는 화해와 협력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위안부 진실 왜곡과 신사참배, 독도 쟁점화로 뒤통수를 치고 있다고 여긴다. 그때의 인사가 쇼가 아니라면, 진정이었다고 믿게 하려면 지금이 기회다. 이번을 놓치면 아베에게 얼어붙은 한국민의 마음을 다독일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