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메르스 퇴치 급한데 정부·지자체 싸울 틈 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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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호 02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에 대한 대응을 놓고 정부와 서울시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4일 갑작스러운 심야 기자회견에서 “메르스 확진 환자인 A씨가 1565명이 모인 재개발조합 총회에 참석했지만 정부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다음날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며 국민의 불안감만 키우고 있다”고 맞받았다. 5일엔 박근혜 대통령이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메르스를 해결하려고 할 경우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박 시장은 6일 또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환자 확진이 너무 지체돼 문제가 많다”며 “지자체에 환자 확진 권한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여당은 정부 입장, 야당은 박 시장 편을 거들고 있다. 안희정 충남지사 등 일부 야당 소속 지자체장도 독자적인 대응에 나섰다. 메르스 쇼크 앞에서 여야, 그리고 중앙·지방정부 간으로 알력이 번지는 양상이다. 메르스와의 전쟁에 여야가 따로 있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따로 있나.

 정부의 무능한 대응도 실망스럽지만 전염병마저 정쟁의 소재로 삼고야 마는 한국 정치의 수준이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메르스 탓에 온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는 판에 우리 정치권은 서로 싸움이나 벌일 만큼 한가한가. 특히 야권은 메르스 사태가 정치적 지지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도 된다고 보는 건가.

 무엇보다 박 시장의 발표는 신중하지 못했다. 그는 서울시민의 안전을 염려해 신속한 대응에 나서려 했다지만 원숙한 행정가라면 불필요한 혼선과 공포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게다가 발표된 사실관계가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혼란은 더 커지지 않았나. 시민 건강의 수호자를 자임하겠다는 박 시장의 자세에 진정성이 있다면 감염 전문가를 내세워 차분하게 사태를 관리해야 했다. 그의 대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선이 많은 것도 그 때문 아닌가.

 물론 야권 지자체장들이 독자 행보를 보이게 된 데엔 근본적으로 정부의 초기 대응에 대한 불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는 이미 부처 간 호흡도 제대로 맞추지 않는 모습을 연발하며 혼란을 자초한 바 있다. 복지부와 교육부는 학교 휴교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환자가 많이 발생한 병원 명단의 공개 여부를 놓고도 부처 간 의견이 엇갈렸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 정부의 무기력과 무능함을 똑똑히 목도한 국민은 처음부터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이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지금의 과잉반응으로 나타나면서 경제 전체에 타격을 주고 있다. 외신들은 이를 ‘광풍’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거듭된다면 한국의 국격(國格)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누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해 주겠나.

 개인의 건강·위생 관리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너무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진단인데도 국민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이는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일종의 사회현상이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방역대책과는 별도로 ‘메르스 현상’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를 제때 마련하지 못하면 메르스가 자칫 우리 사회의 온갖 갈등에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될 위험이 있다. 이럴 땐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대책이다. 그 첫걸음으로 여와 야, 그리고 정부와 지자체가 당장 손잡고 국민 건강 보호에 진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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