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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요섹남’ 이 불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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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요리에 능숙하지 않다. 유학 생활 몇 년간을 제외하곤 스스로 삼시 세끼를 만들어 먹어본 적이 없다. 딸이 부엌을 서성거리면 도움은커녕 방해만 된다며 내치던 엄마는 이제야 자신의 교육 방침을 조금 후회하는 모양새다. 주말이면 전화해 “제대로 된 밥을 먹어야 할 텐데”하는 엄마에겐 이렇게 답한다. “걱정 마. 엄마가 해주는 것보다 더 영양가 넘치는 음식을 매일 사 먹고 있어.”

 그러니 요즘 TV에 넘쳐나는 요리 프로그램 ‘쿡방’을 보는 것은 ‘생활의 달인’이나 ‘스타킹’을 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날재료를 쓱쓱 다듬고, 현란한 칼 솜씨로 썰고, 이런저런 조미료를 계량도 하지 않고 척척 뿌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신통방통하다는 생각뿐이다. 셰프들이 남의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15분 만에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JTBC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다 도전정신이 생겨 냉장고를 불쑥 열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 재료로 음식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다. 아 몰라, 나가서 먹자.

 “요리 잘하세요?”란 질문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위축된다. 그림을 못 그리고, 달리기를 못하는 건 부끄럽지 않은데 요리를 못하는 건 뭔가 중대한 결함 같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여자인데’라는 내 안의 고정관념이다. 쿡방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도 결국 남자들이, 여자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요리를 기가 막히게 해낸다는 그 의외성에 있다. ‘삼시세끼’에서 케첩을 직접 만들고 아궁이에 빵을 굽는 차승원은 진심으로 대단하다 싶었지만, 거북스러운 장면도 적지 않았다. 밖에 나가 몸을 써서 재료를 구해 오는 이는 ‘아빠’요, 이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이는 ‘엄마’라는 설정의 반복 때문이었다. ‘요섹남(요리를 섹시하게 하는 남자)’이란 말 역시 들을 때마다 불편하다.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요리하는 여자가 별로 섹시하지 않듯, 남자도 그렇다. 이런 억지스러운 표현까지 만들어 가며 남자들에게 요리 좀 해보라고 권해야 하는 현실.

 언젠가는 요리에 익숙해지고 싶다. 여자로서의 미덕을 갖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상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 정도는 갖추고 싶어서다. 아직은 엄두가 나지 않기에 남자 셰프들만 나오는 ‘쿡방’ 대신 ‘식샤를 합시다’나 ‘고독한 미식가’ 같은 ‘먹방’을 즐겨 보며 침만 삼킨다. 당분간은 나보다 요리 잘하는 이들의 손에 나의 생존을 맡기는 것도 괜찮지 않나, 라고 위안하며.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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