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전문기자 수지 멘키스 "서울의 모든 것이 궁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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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수지 멘키스((Suzy Menkes·72·사진)는 독특한 존재다. 특정 매체에 속해 일하는 기자인데도, 이 사람의 동태가 세계 패션계의 화젯거리다. 지난해 그가 오랫동안 일했던 한 언론사를 떠나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 자체가 실시간으로 전세계 주요 언론에 타전됐을 정도다. 그는 50년째 ‘패션 전문 기자’로 살고 있다. 1966년 영국 타임스에서 시작해 84년부터 프랑스에 근거를 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에서 패션 담당 기자로 일했다. IHT는 2013년 10월 제호를 뉴욕타임스 국제판(INYT)으로 바꿨다. 멘키스는 INYT를 떠나 지난해 5월부터 패션잡지 보그의 국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영국·프랑스·스페인·러시아 등 전세계 19개국의 보그 웹사이트에 패션 소식을 전하는 자리다. 보그에 따르면 인터넷과 모바일로 그의 패션 뉴스를 보는 사람만 한 달에 2억 명이 넘는다. “특정 지역의 패션이 국제화되기 시작했던 80년대부터, 모든 게 디지털 기기로 빠르게 전달되는 지금까지 모든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봐 왔다”는 그를 만났다.

지난달 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콘데나스트 인터내셔널(CNI) 럭셔리 콘퍼런스’에서다. 멘키스가 연사를 초청해 대담을 나누는 국제 포럼이다. 그는 여기에 애플 아이폰을 디자인한 조너선 아이브 애플 수석 부사장, 세계 최대 명품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차기 회장으로 꼽히는 앙트완 아르노, 샤넬의 창조부문 총괄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등 쟁쟁한 인물들을 한꺼번에 불러 모았다. “서울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멘키스는 내년 자신이 주관하는 포럼을 서울에서 열 계획이다. 멘키스의 ‘패션 기자 50년’을 들어 봤다.

미국의 유명 주간지 뉴요커는 멘키스에게 별명을 붙여줬다. ‘파리의 사무라이’다. 파리에 본사를 둔 INYT에서 정곡을 찌르는 비평을 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하. 오랜만에 들어보는 별명이네요. 너무 공격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아 기분 나쁘지 않냐고요? 전혀. 정말 좋아하는, 아니 영광스런 호칭이죠.”

멘키스는 20여 년 동안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세계 4대 컬렉션의 거의 모든 패션쇼 일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쇼가 시작되기 무섭게 수첩에 열심히 필기를 하고 전세계에 기사를 타전했다. 새로운 창작을 위한 디자이너의 노력이 엿보이지 않았을 땐, ‘새로운 것이 없었다(nothing new)’라고 쓰는 등 직접적이고 날카로운 비판 기사를 썼다. 그래서 얻은 별명을 그는 무척 즐기는 듯했다.

2001년엔 그의 영향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발단은 멘키스가 세계 최대 명품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에 속한 브랜드 존 갈리아노 패션쇼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기사였다. 존 갈리아노를 비롯, 디올·지방시·루이비통 등 수십 개 명품 패션브랜드를 거느린 LVMH 그룹은 보도 직후 멘키스를 그룹 소유 브랜드 패션쇼장에 출입 정지시켰다. 비판적 기사에 취재 거부라는 맞대응 소동은 일주일 만에 LVMH가 사과하며 일단락됐다. 멘키스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다.

수십 년간 쌓은 경험, 정확한 관찰력, 예리한 필력으로 명성을 얻은 그에게 “잘못된 비평이었다고 후회하는 기사는 없는지” 물었다. “늘 진지하게 기사를 쓰려고 노력해요. 중요한 건, 내 기사가 실제로 눈 앞에서 벌어진 걸 토대로 쓴 얘기라는 사실이에요. 단순히 어떤 옷이 내 마음에 들었다 아니다가 아니죠. 어떤 디자이너의 창작물, 그것 자체에 근거해서 판단한 겁니다.”

일흔이 넘은 그는 지난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40여 년의 신문 기자 생활을 접고 인터넷 웹사이트 보그의 에디터로 변신한 것이다. “인쇄물에만 머물러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신문 기자로도 보람 있었지만 이제 온라인에 기사를 써야 할 때라고 결심했죠.”

멘키스는 명품 업계의 쟁쟁한 인물들과 수십 년 친분을 이어왔다. 내년엔 멘키스의 화려한 인맥이 서울을 찾는다. 2000년부터 주관해 온 ‘럭셔리 콘퍼런스’ 때문이다. “세계 명품 산업의 리더들이 모여 영감을 얻어갈 수 있는 자리죠. 좀체 만나기 힘든 연사들이 이들의 통찰력을 자극할 겁니다. 왜 서울이냐고요? 이제 서울에서 그것을 확인할 차례예요. 아마 내년에 서울에 모인 사람들 각자가 그 해답을 얻어 갈 거에요.”

영국 태생의 멘키스는 캠브리지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학생 신문인 바시티(Varsity) 최초의 여성 편집장도 지냈다. 영문학·역사학을 공부한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 유학을 했다. 유명 패션학교 에스모드파리에서다. “파리에서 2년 동안 패션 공부를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렇게 고될 줄 몰랐거든요. 옷 짓기가 왜 그렇게 어렵던지. 원래 하던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깨닫게 된 소중한 계기였죠. 하하.”

멘키스는 66년 영국 타임스의 패션 담당 기자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INYT를 거쳐 보그까지, 올해로 50년째 현역 패션 기자로 살고 있다. 그는 질 좋은 수공예 전통품일 뿐이던 유럽의 몇몇 브랜드가 국제적 명품 브랜드로 성장하던 90년대를 지켜봤다.

“아시아에선 홍콩이 유럽 명품 브랜드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어요. 그 지역의 거대 유통업자와 손잡은 게 (현재 명품 브랜드의 괄목상대할 성장에) 큰 도움이 됐죠. 지금은 달라졌어요. 작은 브랜드도 세계 각국에 직접 매장을 운영할 정도가 된 거죠.”

멘키스가 명품 브랜드의 활동, 특히 패션쇼의 창작물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 기사를 많이 썼지만 그 중엔 좋은 비평도 많았다. 브랜드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린 글이었다. 불가피한 결과로,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명품을 갖고 싶어 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기기도 했다.

“정말 좋은 상품, 아름다운 물건을 갖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긴 하죠. 명품이란 건 감촉이에요. 그것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정성 말입니다. 한데 루이비통 가방을 가지는 게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혹시 명품을 너무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어요. ‘삶의 균형을 유지하라’고요.”

피렌체=강승민 기자 quoiqu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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