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8)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61)-말썽많던 원고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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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운정 김정진이라면 지금 알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윤백남과 같이 희곡을 주로 썼고일본 보지신문의 경성특파원을 지낸 사람이다. 경성일보 촉탁으로 있으면서 매일신보에 연재소설을 쓰고 있었다.1933년 가을 방송국 제2방송과장으로 취임하면서 매일신보의 연재소설을 끝내고 원고료를 받으러 왔었다. 나는 「김정진작 연재소설의 원고료」라고 출금전표를 써 지배인한테 가지고갔다.
『김정진? 김정진?』하고 지배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무슨 비밀장부를 꺼내보았다. 그리고는 원고료 액수를 반으로 줄여 붉은 잉크로 그 전 것을 지우고 다시 썼다.
『이사람은 촉탁이니까 반액을 주어야해. 다음부터 그렇게 써와요.』
나는 반밖에 안되는 돈을 받아 가지고 와서 김정진한테 사과하였다. 그전에는 김정진이라고 쓰지않고 김운정이라고 써왔고, 소설에도 김운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을 본명으로 썼으므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운정은 수적은 화곡작가의 한사람으로 처음에 육당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의 사회부기자로 출발하였다.부인이 일본여자인 때문인지 일어에 능했으므로 앞서 말한대로 일본보지신문사 경성특파원을 지냈고, 경성일보 촉탁도 되었고, 나중에는 윤백남의 후임으로 방송국 제2방송과장이 되었다.제2방송과란일본어방송인 제1방송에 대해 조선어방송을 주관하는부처였다. 방송국 이야기는 차차 나올 터이므로 그때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운정은 제2방송과장이 된뒤 얼마 못가 암으로 별세했다.
그는 키가 작고 몸이 말라 풍채는 당당하지 못했지만 사람이 매우 자상하고 친구를 좋아하였다. 방송과장시대에 툭하면 전화로 행인· 백화· 횡보, 그리고 나를 불러내 술을 사주었다. 그는 재담을 잘하여 해학으로 우리들을 웃기기를 잘하였다. 벽초와는 매우 친한 사이여서 벽초가 교동학교 뒷골목에 살때 나를 데리고 가 인사시켰다. 벽초는그뒤로 가끔 만났는데, 그는 낙원동으로 내려가다가 건국대학 분교 골목 모퉁이에 있는 대동서림이라는 헌책사에 자주 나타났다. 그 주인이 지독한 곰보여서 그책사를 곰보책사라고 불렀는데,그주인이 벽초가 나타나면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았다.
원고료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졌는데, 끝으로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석송 김형원이 이상협부사장시대에 편집국장을 할 때였다. 이사람은 조선의「휘트먼」이라고 자칭하는 시인인데, 험구인 정지욕이 석송을 평하기를 『제가 조선의「휘트먼」이란말야! 일본말 번역책을 한두권 읽어가지고 「휘트먼」흉내를내는 모양인데, 제 실력으로 어떻게 「휘트먼」의 깊이를 알수 있어! 내가 그사람 시를 읽어보았는데,「휘트먼」의 발가락이나 빨라고 그래!』 하고 극언을 해 여러사람을 웃긴 일이 있었다.
석송이 하루는 점심때 나를 불러 유명한 술주정뱅이 모시인에게 원고료 선불로 15원을 주어야겠으니 4시까지 돈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원고료 선불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이게 웬일일까하고 주저했더니 석송말이 오늘 그시인을 만났는데,신에 들어갔다고 욕을 하면서 자기는 굶으니 쌀값으로 15원만 보내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안줄 수가 없으니 변통해달라는 것이였다. 나는 생각한 결과 이렇게 하자고 했다.
모시인의 성명도장을 내가 파와 15원 받은 영수증에 찍을테니 그 옆에 편집국장이 틀림없다는 보증도장을 찍어야 하고, 원고는 석송 자신이 모시인 이름으로 써와야겠다고 하였다. 일이급해 그렇게 하기로 하고 15원을 보냈는데, 석송은 원고를 안써 왔고,경리부에서 말썽이 되어 석송이 불려가더니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몰랐다. 석송이 돈을 물어냈다는 소문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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