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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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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한의「9·9절」은 이른바 정권수립일이다. 당시 36세였던 김일성은 권좌에서 다시 36년을 보내 이제는 72세의 노인이다.
그런 김일성의 북한을 가리켜 원자화사회(atomized society)라고 표현한 학자도 있다.
김일성 개인숭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어 사회의 수직관계는 견고한 편이나 주민 상호간의 수평관계는 모래알처럼 결속력이 없음을 묘사한 말이다.
그것은 주민들의 부단한 자기비판과 상호감시체제하에서 종적인 충성만 강요하고 횡적인 유대를 억제해온 전체주의 통치의 당연한 결과다. 그런 사회는 구심점을 잃으면 하루아침에 전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
김일성이 비록 권력을 김정일에게 승계할 수 있다해도 그가 장기독재를 통해 쌓아놓은 개인적인 카리스마나 권위마저 상속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이 사회적 결속을 유지키위해서는 주민들에게 물질적 대가를 제공치 않을 수 없다는 것이「브란트」(Vincent Brandt)교수의 전망이다.
하버드대학 인류학교수인 그의 예언은 북한이 금년 들어 취한 몇가지 외향적 조치에 비추어보면 더욱 선명해 진다.
지난 1월 평양은 부주석 이종옥, 수상인 강성산등 경제전문 기술관료들을 대거 승진 기용하고「경제과학위원회」를 신설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관계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뒤이어 중공의 자본주의 경제실습장인 경제특설구에 대규모 시찰단을 보내 중공의 개방주의 실험을 견학케 했고 최근엔 합영법을 만들어 서방국가들에도 합작기자의 길을 터놓았다.
평양을 방문한 일본사회당 위원장「이시바시」(석교정사)를 맞아 김일성은 앞으로 일본을 비판하지 않고 우호관계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종래 북한의 선전체계가 대일자세로 볼 때 이것은 대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북한의 움직임들은 모택동말기의 중공을 연상케 한다.
60년대 중반이래 중공에선 강경좌파인 사인방과 온건우파인 주자파사이에 격렬한 정책논쟁,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인방은 자본주의국가와의 대결과 대내혁명의 계속을 주장했고 주자파는 서방선진 자본주의 국가와의 협력을 통한 경제건설을 강조했다.
중도적 입장에서 이 싸움을 지켜보던 모택동은 권력은 자기 처 강청이 이끄는 사인방에 주고 정책은 주자파의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북한에선 김정일이 기존노선의 고수와 대남무력도발을 주장하는 반면 기술관료들은 새로운 중공형 근대화방식의 도입을 강조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양파의 증간에 서있는 김일성도 모택동처럼 권력은 강경좌파인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주고 정책은 온건우파의 개방주의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김정일이나 사인방은 폭력을 휘두르고 폐쇄적 극좌적이며 과격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는 점에서 일치된다. 그런점에서 그 둘은 부통주의적이다.
북한의 테크너크래트와 중공의 주자파는 개방적 합리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점에서 유사하다. 따라서 그 둘은 다원논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과정에서는 전통주의와 다원주의사이의「갈등」과 그로인한 사회적「긴장」은 불가피하다.
중공은 천하대난이라는 문화혁명과 모택동 사후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실용주의의 승리로 낙착됐다.
북한이 그런 갈등과 긴장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가 자못 궁금하다.
북한의 장래를 중공의 선례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김일성 생존기간 중엔 김정일 체제가 존속되겠지만 모택동처럼 그가 후계체제 정착 이전에 사거한다면 북한은 일대 혼란을 겪게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립과 폐쇄에서 벗어나 경제적 성과를 올려보려는 평양의 움직임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폐쇄적인 전체주의체제는 대외적인 개방으로 전환할 때 내부적으로는 통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일반화된 관례다. 따라서 북한이 경제적인 필요상 다소 개방조치를 취한다해도 내부체제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기미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북한의 개방정책이 군사노선과 대체된다면 이를 남북경제교류로까지 유도하여 우리가 지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더 많은 교류와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동·서독의 경우를 보고도 한번 상상해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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