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은 민중자율로 이어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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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글은 본지가 마련했던 시리즈 『마당극』(84년8월27∼29일)을 읽고 연출가 무세중씨가 편 반론 『민중 자율의「마당」은 없었다』(본지9월15일자)에 대한 연극평론가 박인배씨의 반론이다.
선배님.
우리 민속극을 널리 보급시키려고 노력하시던 선배님들의 활동은 오늘날 한국연극에 마당극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안겨준 큰 힘이었습니다. 마당극, 즉 우리시대의 탈춤을 재창조해보겠다는 후배들의 의욕도 모두 선배님들이 이룩해 놓은 기반위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글을 선뜻 발표하는 것이 후배 된 도리로서 안 되는 줄 알면서도,『민중자율의 마당은 없었다』라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옳지 못하다』라고 할뿐만 아니라 저 자신도 10여년간 탈춤과 마당극의 성장을 보아오면서 그렇지 않은 많은 사례들을 알고 있기에 감히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선 전통탈춤에서「마당」을 누가 구성했느냐에 대해서입니다. 설사 양반들의 묵계하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마당판을 꾸며나가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손발에 직접 흙을 묻히고 일하던 농부들이저 않았습니까. (그런 점에서 오늘날 전해지는 사당패의 놀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들의 놀이가 아닙니다. 농촌에서 도회지로 전달되면서, 또 일제시대의 탄압과 그 이후의 박제화를 통해 그 민중적 성격이 퇴락되었다고나 할까요) 주체가 농민들일진대 거기서 놀아지는 내용은 그 당대 민중들의 절실한 삶과 염원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마다 민중 스스로에 의해 탈춤이 추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마당」은 민중자율의 힘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지배세력의 힘이 팽팽하게 맞서는 공간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두번째는 풍자나 한풀이가 자율적인 카타르시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분노와 저항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가는 기필코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속에서 찾아지는 공동체의식을 자기들끼리만 확인하는 암호였습니다. 그러므로 풍자의 의미와 힘은 빼앗기고 쫓기고 억눌려온 민중들의 정서로 접근해야만 쉽게 이해된다고 봅니다.
제가 위의 두 가지를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전통민속극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다기보다는 그것이 오늘날의 민중현장에서 생생하게 수용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한국 근대연극사가 서구연극의 형식적 수용에만 급급하여 민중을 기만하고 자기도취에 빠져있을 때, 민중은 스스로 연극적인 기량을 발휘하여 촌극·구전가요·만담등의 형태로 풍부한 자산을 만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실험적으로 이루어지던 마당극이 확실한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도 이들과 만나면서부터이고, 그 연극적 자산을 활용함으로써 80년초의 대 확산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당극이『극으로서 놀이라곤 바탕 위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동시대적인 상황을, 현장을 예리하고 냉철하게 표출해내서 의식의 힘을 일깨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에 전체적으로는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극으로서의 절제」가 「극으로서의 폐쇄」로「합리적으로」「객관적으로」가「내용의 애매모호한 추상화」로 이해되는 우리의 연극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끝으로 마당극이 섣불리 민중성을 전제해서 허를 내보여서 마당극의 환경이 더욱 경직될 것에 대한 염려의 말씀은 후재의 입장에서는 고맙게 생각해야 되겠지만 그런 어려움은 예술가의 양심으로 감수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일은 우리 연극인들이 못다해 낸다고 할지라도 현재 힘차게 성장하고 있는 민중들에 의해서 뒤가 이어지리라고 봅니다.
새로운「마당」은 민중스스로에 의해 찾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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