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7) - 30년대의 문화계 (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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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그해(l931년)는 나라 안팎으로 다사다난하던 해였다.
이충무공의 후손이 묘소를 은행에 잡혔었는데, 돈을 못내 묘소가 경매당하게 되었으므로 각 신문사에서 들고 일어나 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이것이 5월의 일이었다. 다음 7월에는 만간산사건이 터져 전국에서 조선사람이 모호한 중국사람을 때리고 집과 가게를 쳐부수는 사건이 생겼다. 이것은 사실인즉, 일본군부가 만주사변을 일으킬 구실로 한중 두 민족의 싸움을 붙인 것이였다.
이어 9월18일에는 유명한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일본군은 순식간에 전 만주를 군사점렴하였다.
이에 앞서 국내에서는 6월에「카프」 사건이 발생해 70여명의「카프」맹원이 검거되었고, 11월에는 경성제대 학생을 중심으로 조선학생과 일본학생이 합작해 일으킨 반제동맹사건이 있었다.
이 많은 사건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만주사변이었는데, 순서에 따라 이충무공 묘소 문제부터 이야기해 나가기로 한다.
이충무공의 산소가 있는 충남 아산군 사정리의 묘소와 위토 60두락을 충무공의 13대손인 이종옥이 19l9년 서울 조흥은행 본점에다 l천3백원에 저당잡혔다. 그후로 은행에 이자를 한푼도 안내고 10여년을 끌어왔는데, 은행에서는 빚이 이자까지 합해 2천4백원이 되자 더 참을수 없어 경매에 붙이겠다고 통고해온 것이었다.
이사실이 5월 열흘께 동아일보사회면에 크게 보도되자 뒤이어 위당 정인보의 『이충무공묘소 경매문제』 라는 제목의 피끓는 글이 게재되고, 『민족적 수치』 라는 사설이 나타나자 민족의 의분이 폭발하여 충무공 묘소를 지키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조만직ㆍ 윤치황·안재홍등이 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민족적 위인들의 묘소를 비롯한 여러가지 유적을 보호하자는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충무공 묘소를 도로 찾는데 쓰라는 의연금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이 50전ㆍ 1원하는 영세한 돈으로 노인들의 담뱃값으로부터 어린애들의 콧물 묻은 돈이었다.
이광수 편집국장은 아산에 있는 충무공 묘소에 파견되어 현지사정을 신문에 게재하고 6월부터 장편소설 『이순신』 을 연재하였다.
의연금이 의외로 많이 들어와 이돈으로 현충사를 새로짓고, 묘소와 비각을 수리하고, 청전 이상범이 충무공의 영정을 그려 모시계 되었다. 이 일로 쓰러져가는 애국선열들에 대한 추모심이 크게 불붙게 되었다.
6월에는 「카프」 의 제1차 검거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의한 예비행동으로 일본에서 「나프」맹원을 검거한 뒤에 일어난 일인데, 그자세한 내용은 일체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로서는 알길이 없다.
다음으로 만주사변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일본이 큰 경제공항 속에 있어서 이 공황을 해결하는 길은 일본이 항상 침흘려 오던 대륙 진출을 감행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일으킨 것이다. 겸해서 그때 만주의 주인인 장학량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붙어 만주에 있는 일븐의 권익을 박탈해갈 기세였으므로 일본으로서는 겸사겸사해서 하루바삐 군사행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었다.
이래서 9월 l8일 방 10시를 기해 미리 매수한 중국 병정을 시켜 만철본선인 북대영부근의 유조구철교를 폭파시켰다. 일본 수비대는 이것이 중국군대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북대영에서 중국군을 공격함으로 인하여 중일양군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예정대로 다음날 19일에는 봉천 (지금의 심양)을 점령하고, 그 다음날 20일에는 만주와의 국경인 안동현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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