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신년기획중산층을되살리자] 下. "일자리 정보, 정부서 얻었다" 6.1%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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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4시30분. 3412번(서울 강일동~대치동) 버스 운전기사 이순희(52.여)씨는 첫차를 몰고 나가며 새해를 열었다. 이씨에게 지난 6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1999년 남편의 의류업체가 외환위기 여파로 부도를 맞아 온 가족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화병을 못 이긴 남편은 자리에 누워 버렸다. 난방도 안 되는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한겨울을 나자 악이 받쳤다. 2001년 친구에게서 학원비를 빌려 무작정 대형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벼랑 끝에 몰렸기에 남자도 뚫기 어려운 버스회사 시험도 너끈히 통과했다. 앞만 보고 달린 4년. 지난해 봄 큰딸을 시집 보냈고, 막내 아들은 대학생이 됐다.

#좌절

서울 구로동의 중소기업 경리로 일하고 있는 김모(54)씨. 그는 97년까지만 해도 종합금융사의 잘나가던 임원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회사가 쓰러지자 김씨의 인생도 반전했다. 실업자가 된 것도 모자라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재산 가압류 소송까지 당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자 아내도 이혼 후 떠나 버렸다.

혼자 남은 김씨는 빚을 끌어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손을 댔다. 그러나 그럴수록 빚만 불어났다. 전혀 경험이 없는 장사였으니 당연했다. 결국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이젠 친구 회사에서 겨우 밥벌이만 하고 있다. 언제 가족과 다시 합칠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국가 부도의 위기 앞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사회로 내던져진 중산층. 일부는 피나는 노력 끝에 재기에 성공했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좌절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 다시 일어선 사람들에겐 따뜻한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배려는 너무 부족했다. 좌절한 사람들은 경험 없는 일에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

◆ 가족의 합심이 힘=서울승합자동차에서 일하는 370명의 버스기사 중 32명은 여성이다. 이순희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이 회사 구영화 부장은 "기사가 1000명씩 되던 과거에도 여성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요즘엔 주부들의 취업이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의정부시 신모(34.여)씨도 부부가 힘을 합해 재기의 꿈을 키우고 있다.

외환위기 후 남편의 운수회사가 부도났다. 신용불량자 통지서를 받던 날 부부가 함께 자살하려다 죽을 결심이라면 뭔들 못 하겠느냐며 일어섰다. 남편은 택시기사로, 신씨는 구청에서 운영하는 여성회관에서 무료 취업교육을 받은 뒤 잉크회사 품질검사 직원으로 취업했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여성 고용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85만6000여 명이 늘었다. 하지만 소득에 따라 일자리를 10등급으로 나눌 때 하위 3등급에 전체의 64.2%가 몰려 있다. 여성 취업은 주로 저소득에 몰려 있어 여성을 위한 다양한 직업 교육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 눈높이를 낮추면 길이 있다=삼성전자 경북지사 이정훈(36) 그룹장은 98년 노숙자로 6개월간을 전전했다. 운영하던 대리점이 부도를 내자 빚쟁이를 피해야 했다. 그러나 이씨는 대리점을 운영하다 알게 된 삼성전자 임원의 도움으로 2000년 가전제품 판매사원으로 취직했다. 한때 사장 소리를 들었지만 다시 노숙자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기꺼이 판매사원이 됐다. 매일 밤 11시를 넘기며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다녔다. 2003년엔 25억원어치를 팔아 '연봉 1억원'의 판매사원이 됐다. 김대중 경총 아웃플레이스먼트팀장은 "성공적으로 전직하려면 미리 준비해야 하고 눈높이를 낮춰 예전 직장보다 보수가 낮아도 일단 경력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 자영업은 신중하게=2000년 3억원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 개인사업(주류업)을 접고 길거리에 나앉은 정종일(48)씨. 막노동과 일용직 등을 전전했던 그는 건국대 앞에서 포장마차로 재기 중이다. 그나마 포장마차는 주류업과도 연관이 있어 재기의 발판이 됐다. 정씨는 "장사 경험이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크게 벌이면 실패할 확률이 크다"며 "작게 시작해 경험을 쌓으며 키우는 게 안전하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 상일동에 70평 정도의 하우스 꽃집을 운영하는 김만수(48)씨는 은행원 출신이다. 다니던 은행이 합병되자 2000년에 명예퇴직을 했다. 김씨는 평소 화초에 관심이 많았다. 마침 아내는 꽃꽂이 자격증까지 있었다. 이 경험을 살려 꽃가게를 시작해 자영업에 연착륙했다.

◆ 특별취재팀=경제부 정경민 차장(팀장).김종윤.허귀식.김원배.김준술 기자, 신창운 여론조사전문기자, 정책사회부 정철근 기자, 산업부 윤창희 기자, 사건사회부 손해용 기자, 사진부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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